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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 딛고 바라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_출처 : 바이브랜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의 알토란 공간이 아트 스페이스로 낙점됐다. 사람들은 이제 드래곤 마운틴 한복판에서 두 발 굳게 딛고 아름다움을 사색한다.
용산이 된 아모레퍼시픽
자사 팝업스토어나 명품 브랜드 매장을 입점시켜도 신사옥과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총공사비 5355억 원, 4394평 규모의 대형 건축물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참을 수 없는 자본의 무거움.
용산 아모레퍼시픽 신사옥_출처 : APMA
신개념 빌딩 숲을 설계한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1층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개방형 공공장소(아트리움)를 설계했다는데 이는 신사옥의 알짜배기 공간이다. 데이비드 카퍼필드 못지않은 마술이다.
“임원은 두 발을 굳게 땅에 딛고서도 별을 볼 수 있는 거인(巨人)”이라고 오피스 웹툰 ‘미생’은 말한다. 오너 일가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두 발을 굳게 딛고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morePacific Museum of Art. 이하 APMA)이라는 이름으로 상설 전시관을 만들고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 특별전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프랑크푸르트’(2007)를 구경하는 관람객들_출처 : 바이브랜드
최근 상사로부터 휴식을 지시받았다. 머리를 식히란 배려 뒤에 감춰진 취재 아이템 확보전략. 고백하자면 가만히 쉬고 싶단 생각이 들 때마다 전시회를 찾았다. 오랜 습관이다.
그렇게 APMA 사진전을 찾아 독일 출신 사진가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솜씨를 감상하기에 이르렀다. 액자 크기에 크게 놀랐다. 스마트폰 액정에서 느낄 수 없는 실물 사진의 선명한 화질이 인상적이다. 앞으로 다가갈수록 작품의 오라가 두 눈을 압도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기분에 휩싸인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지인과 동반관람에 나서며 인상적인 작품을 물었다. “평양 아리랑 축제를 담은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평양 VI, 2017(2007),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_출처 : APMA
덧붙여 그는 “이 작품은 작가가 북한 당국에 계속 요청해서 겨우 찍을 수 있었대요. 멀리서 보면 십만 명이 매스게임 속에서 군무를 추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오죠.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요.”
기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근/원거리 시점에서 각자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프레임 앞에서 위치를 계속 바꾸는 이유다.
롤러코스터를 유튜브로 보는 것과 실제로 탑승하는 게 다르듯, 실물이 상상을 압도하는 작품들이었다. 듬성듬성 배치된 사진액자가 고요한 회랑 안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사진은 마음에 의미를 건다
2022년은 유독 사진 전시회가 붐빈다. 회화도 있고 공예도 있지만 아트 갤러리마다 사진전이 대흥행이다. 실제 서울 내 미술관 전시를 보면 사진 관련 콘텐츠가 압도적이다. 오늘날 사진 전시가 인기를 끄는 건 감상자의 주관에 기대는 예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진은 이 세상에 없는걸 다루지 않는다. 천천히 갤러리를 누비며 눈에 들어온 감흥만으로도 갖가지 영감을 취하기 좋다.
예술과 브랜드는 그래서 삶에 위안을 주나보다. 쾌감이 직관적으로 머리를 강타한 뒤, 이내 마음을 움직이니까.
출처 : 바이브랜드
일상적인 풍경 사진으로 현대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시간. 똑똑한 사진가는 상식을 벗어난 시선을 포착하고 작품에 특별한 메시지를 끼워 넣는다. 우리가 예술사진의 피사체로부터 독특한 감흥을 얻는 이유다. 40여 점의 작품 속엔 현대인이 분명 알고 있었지만 무딘 감성으로 흘려버리고 마는 21세기의 진실이 유감없이 담겨있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무인 사물함에 맡긴 짐을 꺼내며 수년 전에 본 영화를 떠올렸다. 이자벨 위페르가 사진가를 연기한 작품이다. 그녀는 해변에서 근사한 여성을 만나 사진을 찍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겁니다.”
- 클레어의 카메라(2018)
새처럼 관찰하기
1. 나트랑 Nha Trang(2004)
이웃과 옹기종기 붙어 앉아 손으로 열심히 공예품을 만드는 여성들. 새가 땅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다른 리듬으로 노동에 임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출처 : 바이브랜드
조감은 인간 중심 시선을 해체시키고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한다. 두뇌는 새로운 해석을 거치며 ‘낯선 통찰력’을 얻는다. “숲 안에 있으면 나무만 헤아릴 뿐, 숲 전체의 모습을 헤아리지 못한다”라는 오래된 비유를 생각해 보자. 안드레아스 거스키는 이번 전시에서 조감 구도 사진을 여럿 선보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 탈인간화 된 사진 구도가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 이번 전시작의 공통적인 특징.
출처 : 바이브랜드
한편 사진 속 여성들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전선줄이 안정적인 수평구도를 연출한다. 균일한 격자 모양이 반복 노동을 고수하는 노동자 모습 위에 얹힌다. 사진 속 패턴을 찬찬히 살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저들과 얼마나 다른가’, ‘인간 노동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 작품에 던지며 갤러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조작된 호들갑
2. F1 피트 스톱 I (2007)
작가는 원거리에서 포착한 풍경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며 작품에 알 듯 말듯 한 메시지를 녹인다. 피사체의 모습에서 무엇을 두드러지게 표현했으며 어떤 걸 감추려 했는지 살펴야 이해가 어렵지 않다.
출처 : APMA
F-1 레이스의 피트 팀 정비 현장과 정비 현장에 환호를 보내는 관람객의 모습을 담아냈다. 인류 문명의 정수가 얽힌 모터스포츠는 그 어떤 스포츠보다도 스펙터클하다. 화면 구석구석 의도적인 콘트라스트를 부여한다. 원색 계열 색채가 돋보일 수 있는 화면구성을 만든 뒤, 레드팀과 화이트팀의 색을 과장되게 부각시켰다. 색채대비를 통해 얻어낸 모터스포츠 현장의 생동감이 일품.
피사체를 강조하기 위해 사진 구성요소의 일부를 합성하는 건 작가 특유의 연출법이다. 컬러 보정과 디지털 합성은 오늘날 손쉽게 사용하는 기술이지만 안드레아스 거스키는 1992년부터 컴퓨터 스캔에 나서며 사진업계에 선구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는 설명이다. 남보다 한 발짝 앞서가면 뭐든 본보기가 되는 법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3. SH IV(2014)
사진 속 히어로는 유리창 너머 자신과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스파이더맨이 그의 또 다른 자아인 배우 토비 맥과이어를 마주 보고 있다.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 할 영웅이 쇼윈도 안에 가로막혀있다니. 구조 안에서 무력해지는 현대사회의 특징일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한 채 고뇌하는 현대인의 자아를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 바이브랜드
출처 : 바이브랜드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를 사진에 출연시킨 작품으로 작가세계의 변화를 예고한 작품이기도 하다. 아날로그 결과물에 디지털 채색을 더한 사진 작품을 과연 예술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감상과 해석은 자유다.
대중문화 코드는 설명이 필요없다. 사전적 지식을 통해 관객은 이미 피사체의 사연을 이미 알고 있다. 스파이더맨이니까. 장면으로 연상한 맥락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감상을 지루하지 않게 이끈다.
지구는 지금
4. 얼음 위를 걷는 사람(2021)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최신작. 기자는 강변에서 자기만의 일상을 즐기는 사진 속 풍경에서 한강공원에서 돗자리를 펼치며 여가를 보내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출처 : APMA
어디에서나 볼 법한 일상 사진이며, 풍경화로서 보편적인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합성사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 : 바이브랜드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인위적으로 흩어져있음을 알아채는 것이다. 커다란 사진 속에서 일정한 간격을 띄고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벌어진 수많은 사건사고를 떠올린다.
전시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작품까지 살피면 원근과 접근이 공존하는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여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전시명 :《Andreas Gursky》
전시기간 : 2022.03.31 – 2022.09.04
전시장소 : 아모레 퍼시픽 박물관(APMA)
김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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