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성씨(姓氏)에 외양까지 비슷한 두 대표는 왠지 자매 같았지만, 아니랍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뭔가, 예술가 같은 직원 한 명을 붙잡고 ‘정말 그런 것이냐’라고 실없이 물으니, 또 잘못 짚었다네요. 심지어 예술보단 숫자에 더 가까운 마케팅 총괄 담당자라고 합니다. 이 스타트업이 하는 일은 결국 도시재생 아니냐고 물어도 그것마저, “아녜요.”
서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2021년 11월 30일 오전 중구의 어디쯤이었습니다. 이곳 사무실은 행사에 쓸 온갖 오브제가 나열된 철제 선반이 벽면을 둘러싸고 있었죠. 익선동의 부활을 이끈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스타트업 '익선다다'의 내부였습니다. 공방(工房)을 떠올리면 으레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처럼, 전반적으로 어수선 한가운데에도 질서가 잡힌 곳은 또 희한하게 잡혀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낯설고, 종잡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익선다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생소한 첫 느낌으로 한 시간가량 두 사람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박지현 공동대표와 김진우 최고마케팅책임자(CMO·이화여대 겸임교수)는 입담꾼이었습니다. ‘남겨진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다(익선동 프로젝트 기획의도 中).’ 그 알듯 말듯 했던 모토나 익선다다의 사업구조가 얼핏,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굳이 ‘의외로’란 수식어를 붙인 건 실무나 사업 능력은 특출난데 뚜렷한 사업 철학까지 겸비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여기던 제 편견때문이었습니다. 박 대표나 김 CMO는 그런 면에서 예외였습니다. 말 한 마디에도 깊은 고민이 묻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익선다다는 지역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별 공무원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된 걸까요.
아래 내용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정리한, 익선다다의 그간 행적입니다. (참고로 앞서 ‘예술가 출신 아닌가’라고 물었던 직원은 사실 김 CMO 입니다.)
익선다다, 익선동에 뿌리내리다
박지현 대표_출처 : 익선다다 제공
익선다다는 2014년 설립된 이후 내년이면 9년 차 스타트업이 됩니다. 1기 익선동에 이어 2기 소제동(대전)에서도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했습니다. 2019년 순천시, 지난해엔 중구에서도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리테일과 외식, 전월세 브랜드도 론칭했죠.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3기 지역 개발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10년이 안 되는 업력에 꽤 많은 것을 이뤄냈네요.
박지현 대표(이하 박 대표)는 익선다다의 아트디렉팅을 담당합니다. 도시공간기획은 박한아 대표 몫이죠. 박 대표는 서양화를 전공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렌트하우스)를 운영하던 박한아 대표가 새로운 공간 운영을 할 만한 곳을 찾던 중에 박 대표를 만나 함께 익선동을 방문했죠. 2013년 당시 익선동은 지가(地價)가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익선동에는 옛것의 흔적이 많이 묻어났습니다.
김진우 CMO_출처 : 익선다다 제공
1920년 정세권 선생(한국 1세대 디벨로퍼)는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등 강북 일대 지역을 개발해 얻은 수익을 독립 후원에 썼습니다. 일제 수탈에 서울로 몰려든 가난한 서민들이 머물 주택이 턱없이 부족했죠. 익선동은 그가 서민을 위한 한옥을 짓기 위해 고심했던 결과물이 유산처럼 남아있습니다.
한가운데에 마당(중정식)을 두는 게 아닌 마루(중당식)를 둬 좁은 부지에 여러 채(100여 채)를 지을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대신 일본에서 마련해온 색과 문양이 화려한 타일로 외관을 꾸몄습니다. 익선동은 그런 역사 위에 서 있는 일종의 ‘퓨전식 한옥 동네’였습니다. 양반가 가옥이 정갈하게 배치된 전통한옥마을과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 친구에게 어디 하나 한국만의 특색 있는 방문지 한 곳 추천하기 힘들었던... 회색 서울 도심에 개성 있는 색채 하나를 덧칠 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익선거리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봄, 다방 열다
익선다방_출처 : 익선다다 제공
단순히 상점 하나를 오픈하는 게 아니라 거리를 꾸며보고 싶었습니다. 박한아 대표와 만난 지 6개월 정도 걸린 시점이었습니다. 2014년 초 ‘익선다다’를 설립합니다. 완전히 이 일에 매진하게 된 것은 설립 6개월쯤 뒤. 그 사이 기존에 각자가 하던 일을 정리했습니다. 어느덧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죠.
2015년 4월, 다시 싹이 움트는 봄이었습니다. 익선다다는 첫 발을 뗍니다. 마실거리를 곁들여 아티스트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공간, ‘익동다방’을 개장한 것입니다. 종로에서도 제일 낡은 동네로 꼽히던 익선동에도 가장 후미진 골목이었죠. 그곳에 수십 년 동안 자리 잡고 있던 이 한옥 한 채를 개조하는 건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당까지 채 스무 평이 되질 않지만 지붕은 비가 새고 흙으로 된 벽은 기울어져 다 무너져가던 곳입니다.
벽 안에 썩어있는 흙을 직접 새 걸로 바꾸고, 하얗게 회칠하는 것으로 마감 처리했습니다. 그러고는 1920년대 한옥 창호 디자인대로 문과 창을 꾸미고 당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구를 들여놨죠. 하드웨어는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살려놓되 안정성, 정취, 콘셉트 등의 소프트웨어만 업그레이드 한 셈입니다.
출처 : 익선다다 홈페이지
‘익동다방의 등장.’ 이 난데없는 생동감에, 그야말로 동네는 떠들썩했습니다. 인근의 서촌과 북촌이 차례로 주목받던 와중에도 홀로 소외받던 익선동은 그제야 생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익동다방부터 2018년 중국식 레스토랑 ‘동북아’까지, 익선다다는 4년 가까운 시간에 익선다다가 익선동에 내놓은 브랜드는 10개. 익선다다에 협업 제안(예를들어 백화점에 익선다다의 F&B 브랜드의 입점 요청 등)하거나 컨설팅을 받는 곳도 수십 곳이었습니다. 광고 촬영지로서는 물론이고, 해외 유명 가수가 표지를 장식한 국내 매거진의 배경으로도 등장했습니다. 소위 ‘인스타성지’로 지목된 F&B 점포, 문화공간 브랜드가 늘면서 2018년 여름 이곳의 유동인구는 7000명(일 평균)을 넘어섭니다.
당시 익선동 매장을 운영하면서 익선다다가 벌어들이는 매출은 35억 원대. 거주자가 아니라면 인사동을 걷다가 우연히 길을 잘못 들러 잠시 머물던 곳이 천지개벽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014년
익선다다 설립
2015년
익동다방 오픈
2016년
공간 매입 후 직접 운영 도입
2017년
소제동 프로젝트 진행 ~2020
2021년
메타버스 등 3기 프로젝트준비
익선다다 설립
익동다방 오픈
공간 매입 후 직접 운영 도입
소제동 프로젝트 진행 ~2020
메타버스 등 3기 프로젝트준비
유명세
출처 : 익선다다 홈페이지
“너네들이 하는 게 도시공간기획자야.” 2016년 쯤, 프랑스에서 온 친구로부터 익선다다가 하는 업의 정의를 외국에선 뭐라고 부르는지를 처음 전해 듣게됩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박 대표는 자신을 그냥 자영업자 정도로 여기고 있었죠. ‘도시재생’이라는 단어도 익선다다 활동 이후 한참 뒤에나 알게 됩니다.
‘유명세였을까.’ 정작 박 대표는 생각도 해보지 못 한 익선다다의 호칭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재생개발기업, 부동산개발업자 등등. 젠트리피케이션도 고민해야 했습니다. 어느 외식업자는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꿈이 백종원이에요(외식사업가)?”
박 대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거리나 지역에 서린 이야기를 기반으로 그것에 맞는 공간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얘기죠. 따지고 보면 익동다방 1호점, 2호점, 3호점 이렇게 늘려나간 게 아니니 엄연히 말해 프랜차이즈 사업은 아닙니다. 물론, 좋게 봐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층 개발이 아닌 단층 개발로도 지역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범사례’라는 측면에서요.
익선다다는 현재 익선동에서 운영하던 브랜드(가게) 대다수를 집주인 요구 등으로 철수했습니다. 사업 초반에는 가게를 임차금을 내고 열어 활성화가 되면 쫓겨나서 새로운 공간을 찾고 하는 게 반복됐죠. 그러다 어느 순간 직접 매입을 하게 됩니다. 사업 운영의 안정성을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지금 익선동에 남아있는 익선다다의 브랜드는 단 한 곳 뿐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경험은 익선다다의 2기로 꼽히는 대전 동구의 소제동 개발 사업에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됩니다.
소제호란 아름다운 호수는 일제강점기 아래 철도 건설이란 명목 아래 1927년 강제로 메워집니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철도 관료, 기술자 및 노동자가 모인 관사촌이 형성됐지만, 한국 전쟁 이후 도시는 쇠락하고 말죠. 개발 직전만 해도 전체 주택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률’이 절반에 가까웠습니다. 2017~2020년, 익선다다는 소제호가 있던 그때를 재해석해 이곳에 새로운 활력을 담아내는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그래서 말인데, 뭐라 불러요?
개인투자자 및 기업 투자로 총 120억 원 규모의 자금을 확보한 뒤 이를 이곳에 F&B 가게와 전시관 그리고 공유오피스·주방, 거주공간 등을 마련하기 위한 물건지 매입과 운영비로 활용합니다. 그렇게 10개 이상의 브랜드를 운영하며 또 한 번 이 땅에 특색 있는 관광 명소를 새기는데 성공합니다. 올해 4월에는 레드닷, IDEA와 함께 세계 최고의 디자인상 중에 하나로 꼽히는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서비스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게 됩니다.
익선다다의 위상은 높아졌습니다. 처음 익선동에서 박 대표 홀로 구슬땀을 흘리며 노후 공간을 바꿔가던 그때와는 달리, 현재는 매장 직원까지 70여 명의 직원을 둔 조직으로 거듭납니다. 본진(본사 사무실을 이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상주 직원은 열다섯 정도)에는 콘텐츠, 공간그래픽, 브랜딩을 연구하는 트랜드랩이란 일종의 연구개발(R&D) 조직(법인)도 두고 있습니다. 음식, 음악, 건축 등 콘텐츠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문화복합체 입니다.
내년에는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이 온라인으로 확장하는 ‘메타버스 공간’을 설계해 공개할 예정입니다. 익선동, 소제동에 이어 익선다다의 3기의 특색을 보여줄 중요한 콘셉트이죠. 서울 신당동을 포함 서울과 전국 곳곳에서 이 공간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들 계획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해외 진출까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직접 벽돌을 나르며 사업을 일궈가던 2015년, 그때의 박 대표는 지금의 익선다다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걸까요. “아녜요. 그런 능력치는 안 돼서 지금부터…. 지금부터는 좀 보려고 합니다만!”
막바지에 ‘공공이 주도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와는 달리 민간이 개입하면 왜 더 잘되나’라고 물었습니다. 민간은 거기에 생계가 걸려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죠. 그 호쾌한 답변에 이 타이밍이다 싶었습니다. 여태껏 망설여왔던, 입속에 맴돌던 질문 하나를 꺼내고 말았습니다.
“저기, 그래서...익선다다는 뭐라 불러야 되죠?” 박 대표와 김 CMO는 약간의 합의 과정을 거치더니 이렇게 답합니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외국에선 디벨로퍼 앞에 ‘어반(Urban)’을 붙여 ‘어반 디벨로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도시의 경제적·상업적 요소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만의 가치를 살리고 사람들을 연결해 준다는 뜻을 덧붙여서요. 그런데 그것도 약간, 끼워 맞춘 느낌이 드는 것도 맞아요. 디벨로퍼라는 용어도 다양한 차원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러 저러한 사정상 그래서 일단, 이번 인터뷰에서는 ‘어반 디벨로퍼 스타트업’으로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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