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코트를 벗긴 건 햇살이며 앱솔루트가 보드카의 절대강자로 자리 잡은 건 예술 덕분이죠.
보드카는 도수 40%를 넘길 정도로 강렬하지만 의외로 재미없는 술입니다. 3무(무색, 무미, 무취)로 대변되죠. 보드카 브랜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앱솔루트(Absolut)는 다릅니다. 잘 노는 인싸 이미지죠. 사실 다른 보드카와 미(味)적으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미(美)적인 차이가 압도적이죠.
144년 이어온 보드카
출처 : 앱솔루트 컴퍼니
앱솔루트의 시작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웨덴 ‘증류주의 제왕’으로 불린 창업자 라르 올슨 스미스는 14세에 이미 스웨덴 보드카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했습니다. 1879년 그는 신기술인 연속식 증류법을 활용해 ‘완벽하게 순수한 보드카(Absolut Rent Bränvin)’를 개발해냈죠. 이는 100년간 스웨덴 술꾼들의 입맛을 사로잡습니다.
1970년대 스웨덴 정부는 독한 술을 지양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앱솔루트가 내수 시장에 한계를 느끼고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한 까닭입니다. 보드카는 러시아 술이라는 인식이 확고한 미국인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죠. 미국 수입 보드카 시장의 8할은 러시아 브랜드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표였던 라르 린드카트는 디자인에 승부수를 띠웁니다. 디자인 에이전시 ‘카를손&브론맨’에 의뢰를 맡겼죠. 카를손은 스톡홀름 골동품 가게에서 찾은 구식 의약용 병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앱솔루트 최초 광고_출처 : 앱솔루트 컴퍼니
짧은 목병에 금속 스크류 마개를 덮은 간결한 디자인. 보드카는 16~17세기 약국에서 배앓이 약으로 판매되기도 했으니 연결고리는 충분했죠. 용기도 의약용 병 전문 유리 공장에 맡겨 제작했습니다. 창업자 스미스의 초상화도 상단에 새겼죠. 우리가 잘 아는 앱솔루트 병의 탄생입니다. 미국에서 형용사는 상표로 쓸 수 없어 ‘Absolute’를 스웨덴어 철자인 ‘Absolut’로 줄여 새로 브랜딩 했습니다.
1979년 앱솔루트는 미국 뉴올리언스 무역 박람회에 출시합니다. 트렌디한 미국인은 독특한 병에 담긴 술에 열광했죠. ‘ABSOLUT PERFECTION’이란 문구와 병 하나만 놓인 광고도 한몫합니다. 사람들이 잡지에 실린 광고를 몰래 찢어갈 정도였죠. 앱솔루트는 미국 진출 1년 만에 1만 2000상자를 팔았습니다. 같은 해 12월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으로부터 디자인 1등 상도 받으며 심미적 가치도 인정받죠. 앱솔루트는 시각 마케팅에서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겉멋만? 내실도 꽉
첫 번째 아트 컬렉션, 앱솔루트 워홀_출처 : 앱솔루트 컴퍼니
앱솔루트는 ‘아트 컬렉션’을 기점으로 예술적인 술로 자리매김합니다. 1985년 앱솔루트는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병을 그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시만 해도 상업 냄새가 묻으면 예술은 망한다는 시각이 팽배했죠. 사업적인 예술가, 예술적인 사업가로 유명한 워홀은 개의치 않고 수락했습니다. 특유의 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앱솔루트를 표현했죠. 이후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 백남준 및 디자이너 톰 포드, 장 폴 고티에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도 아트 컬렉션을 쌓아갑니다.
앱솔루트하면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따라붙지만 1리터 병 기준 3만 원 선으로 사실 고가 브랜드는 아닙니다. 예술가와의 협업이 빚어낸 산물이죠. 저널 오브 마케팅 리서치에 따르면 명화가 부착된 제품에 대한 고객 호응이 일반 제품보다 더 높았습니다. 신개념 ‘아트 제품’을 만든 실험적인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광화문 촛불 시위 현장 이미지에 앱솔루트 보드카 병모양을 입혔다_출처 : 앱솔루트 페이스북
광고도 독특합니다. 카피는 ‘앱솔루트 퍼펙션’을 시작으로 ‘앱솔루트 러브’, ‘앱솔루트 보이스’ 등 간결한 문구로만 구성하죠. 가장 주목받은 건 도시 시리즈입니다. 1987년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이스탄불, 서울 등 세계 주요 도시 특성을 녹여냈죠. 앱솔루트 방콕은 수산 시장의 배들이 앱솔루트 보틀 실루엣을 에워싸고 있으며 아테네는 병의 이미지를 궁전으로 형상화했죠. 항상 콜렉터들의 물망에 오르는 제품입니다.
앱솔루트는 예술로 화려하게 포장하면서 확고한 메시지도 전합니다. 뉴욕 911 테러 당시 쌍둥이 빌딩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표현한 광고로 위로를 전한 것이 대표적이죠. 2015년 6월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을 내리자 앱솔루트는 한정판 ‘컬러스’를 출시합니다. 성소수자(LGBT)를 상징하는 무지개색으로 병을 만들었죠.
1879
앱솔루트 보드카 탄생
1979
앱솔루트 보틀 디자인 완성
1986
앱솔루트 워홀 출시
앱솔루트 아트 시리즈 시작
2016
앱솔루트 코리아 출시
2022
출시 이래 최초 보틀 디자인 리뉴얼
앱솔루트 보드카 탄생
앱솔루트 보틀 디자인 완성
앱솔루트 워홀 출시
앱솔루트 아트 시리즈 시작
앱솔루트 코리아 출시
출시 이래 최초
보틀 디자인 리뉴얼
변질과 변화는 다르므로
출처 : 앱솔루트 컴퍼니
예술 마케팅은 이제 대중적인 기법입니다. 코카콜라는 2012년부터 패션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고용하며 매번 코카콜라에 패션을 입히고 있죠. 보해양조는 지난달부터 작가 기안84의 팝아트 작품을 소주 ‘여수밤바다’ 전면 라벨에 달아 출시합니다. 소비를 통해 문화적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아트슈머(Art+Consumer)’들이 대거 등장한 덕분이죠. 앱솔루트가 예술을 제품에 더한 첫 주자는 맞지만 더 이상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주저앉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앱솔루트는 여전히 보드카 강자 자리를 지켜갑니다.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앱솔루트는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보드카 약 1170만 리터를 팔았습니다.
7월 한 달간 열린 팝업스토어 앱솔루트 홈_출처 : 바이브랜드
병 디자인을 색다르게 하거나 특이한 광고를 만드는 것을 넘어 여러 브랜드와 컬래버한 제품도 선보입니다. 지난달 스트릿 패션 브랜드 널디, 향수 브랜드 포맨트와 함께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팝업스토어를 열기도 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이종산업 간 컬래버는 재미를 중요시하는 2030세대의 소비 심리를 자극한다. 브랜드 인지도도 함께 높일 수 있다”고 전합니다.
“결코 달라지지 않겠지만, 늘 변화합니다.” 앱솔루트의 컨셉 슬로건입니다. 144년의 레거시를 지니고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원동력이죠. 오랫동안 세계인이 즐기는 술이 된 데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기본에 충실하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죠. 145년을 맞이할 앱솔루트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조지윤
info@buybran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