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기엔 얌전해도 성격은 그렇지 않아요.
구찌, 발렌시아가, 미우미우가 런웨이에 올릴 만큼 패션계에서 스포츠의 인기는 뜨겁습니다. 푸마와 함께한 아미, 나이키와 뭉친 자크뮈스도 있었죠. 건강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스포츠는 ‘핫’해졌는데요, 트렌드에 따라 스포티즘이 가미된 화려함의 만연 속에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브랜드가 더 돋보이는 요즘입니다. 70주년을 맞이한 윔블던 챔피언의 아웃핏, 프레드페리 만나보시죠.
코트 위 패션왕
프레드 페리_출처 : Fred Perry
세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챔피언십의 무대, 올 잉글랜드 테니스 클럽. 이곳엔 영국인 최초로 테니스 커리어 그랜드슬램(호주 오픈·프랑스 오픈·윔블던·US 오픈 테니스 대회)을 달성한 한 남자의 동상이 있습니다. 바로 프레드릭 존 페리(Frederic John Perry)입니다. 그가 3년 연속으로 윔블던 남자 단식을 석권했던 1936년 이후로 이 대회에서 영국인 챔피언이 탄생하기까지 70년 넘게 걸렸으니 업적을 기릴만합니다.
프레드 페리는 코트 위 베스트 드레서로도 유명했습니다. 그가 패션 사업을 시작한 것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유죠. 자신의 별명, ‘Fred Perry’를 새긴 손목 보호대로 패션업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다음은 셔츠였습니다. M3로 불린 이 셔츠는 단순하고 늘씬한 실루엣으로 가볍고 기능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테니스 코트 안과 밖에서 멋과 기능을 모두 챙기는 폴로 랄프 로렌의 윔블던·US 오픈·호주 오픈 컬렉션처럼요.
M3(왼쪽), M12(오른쪽)_출처 : Fred Perry
다소 심심할 수 있는 M3에 변주를 준 셔츠가 M12. 칼라와 소매 끝에 두 줄이 들어간 트윈 팁 셔츠에는 탄생 비화가 있습니다. 영국 프로 축구팀 웨스트 햄의 팬들이 클럽의 색상을 담은 셔츠를 의뢰한 데서 시작됐거든요. 프레드페리는 RSC 안더레흐트, 클럽 브뤼헤, 스탕다르 리에주 등 벨기에 프로 축구팀의 셔츠도 만들었습니다. 풋볼 키트 전문가 존 데블린은 경기장에서 ‘스포츠 웨어의 기능성과 스타일’을 모두 잡은 예로 프레드페리를 제시하기도 했죠.
프레드페리 셔츠는 지금도 브랜드를 대표하는 아이템입니다. 현재 국내에 판매되는 셔츠는 M12·M3600·M3636·M6006 등 총 네 가지입니다. M12는 지금도 영국 생산을 고수하고 있으며 다른 제품에 비해 클래식한 핏을 유지합니다. 이에 반해 M3600는 여유 있는 사이즈와 다양한 컬러로 전개됩니다. 최근 수요가 늘고 있는 M3636과 M6006은 긴팔 셔츠입니다. 칼라의 트윈 팁 적용 여부로 두 제품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서브컬처와의 의미 있는 동행
Bar Italia Scooter Club_출처 : Fred Perry
스포츠에 뿌리를 둔 브랜드지만 서브컬처와의 시너지는 성장에 큰 동력이 됐습니다. 바로 여기서 차별점이 두드러집니다. 얌전한 디자인에 그렇지 않은 정신이 투영됐기 때문입니다. 전후 영국이 맞이한 호황 속에 유행했던 ‘모즈(Mods)’ 덕분이죠. 모던 재즈를 즐겨 듣는 모더니스트(Modernist)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모즈는 세련된 스타일을 추구했던 이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베스파를 모는 젊은이로 표현되곤 합니다.
이들 중에는 노동자들도 많았는데요, 낮에 입는 작업복으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밤거리를 런웨이 삼아 멋을 뽐냈습니다. 그 자리엔 프레드페리 셔츠가 빠지지 않았고요. 심플한 디자인으로 수트나 재킷 안에 매치하기 좋았고 스포츠 웨어의 기능성은 땀을 흘려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형태를 유지해 줬거든요. 그렇게 프레드페리는 모즈의 유니폼이 됐습니다. 프레드페리 코리아는 한국에서 베스파와 함께 ‘모즈 데이(Mods day)’를 개최하며 서브컬처의 근본적인 가치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영국 가상 밴드 고릴라즈와의 협업_출처 : Fred Perry
코트에서 스트리트로 영역을 확장한 프레드페리의 다음 행선지는 무대였습니다. 뮤지션의 간택을 받았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레이밴이 여러 아티스트의 아이템이 된 것처럼요. 1970년대 많은 펑크 밴드가 프레드페리 셔츠와 함께 연주했습니다. 독창적인 사운드로 유명했던 펑크 록 밴드 ‘더 잼’이 대표적이죠. 70년대 후반엔 영국 서북부 도시 맨체스터에서 주류 문화에 반하는 젊은 트렌드 세터, ‘페리 보이즈(Perry boys)’가 디자이너 브랜드 의류에 프레드페리 셔츠를 매치하면서 하위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갑옷으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경계 밖에서만 머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 영국 메인 스트림으로 떠오른 브릿팝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냈습니다. 브릿팝의 대표 밴드로 평가받는 ‘오아시스(Oasis)’와 ‘블러(Blur)’의 왼쪽 가슴에 ‘월계관(브랜드 엠블럼)’이 함께 했거든요. 브릿팝의 정의와 평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흐름이자 새로운 ‘영국다움’을 보여주는 감각이었음엔 이견이 없을 겁니다. 결국 서브컬처와의 동행은 브랜드를 메인에 오르게 한 셈이죠.
럭셔리 브랜드 그 이상의 존재로
패션과 음악 그리고 팬이 융합되는 플래그십 스토어_출처 : Fred Perry
평일 오후에 찾은 홍대 입구역은 젊음과 개성으로 북적거렸습니다. 10분 정도 걷자 조금은 한적해진 거리에서 프레드페리 플래그십 스토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2018년 프레드페리는 가로수길에서 홍대로 거점을 옮겼습니다.
계단을 올라 바로 마주한 건 프레드페리 × 라프 시몬스 22년 F/W 컬렉션. 패션 디자이너 커리어 초기 유스 서브컬처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던 그였기에 10년 넘게 프레드페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나 봅니다. 라프 시몬스는 자신의 레이블을 시작으로 질 샌더, 크리스찬 디올, 캘빈 클라인을 거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현재 미우치아 프라다와 함께 프라다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보그는 이 둘의 조합에 대해 ‘체제 파괴적이고 예측 불가하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영국 노던 솔(Soul)에 주목한 라프 시몬스 협업 컬렉션은 브랜드 시그너처 아이템들이 디자이너의 재해석을 거쳐 완성됐습니다. 블랙 컬러가 주를 이루지만 프린팅과 패치로 차별화를 이뤄냈습니다. 메탈 로고나 실루엣을 통해 전하는 독특한 감성도 돋보였고요. 플래그십 스토어답게 여러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파운데이션, 러버보이, 니콜라스 데일리가 그것.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생전에 즐겨 했던 독창적인 메이크업 컬러 웨이뿐만 아니라 그녀의 실제 타투 위치도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프레드페리 × 라프 시몬스 2022 F/W 컬렉션_출처 : Fred Perry
에이미 앱스트랙트 카디건만큼 찰스 제프리 러버보이의 감성이 더해진 스트라이프 인타르시아 가디건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런던의 나이트클럽에 초점을 맞춘 색감과 패치워크가 강렬했거든요.
앞선 협업 컬렉션에 비하면 니콜라스 데일리와의 컬래버레이션은 무난한 편이었습니다. 펑크와 재즈 등 서브컬처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받아 독특했지만 대중적이기도 했습니다. 빈티지에 걸맞은 컬러와 실루엣이 과격하지 않았으니까요.
본질에도 충실했습니다. 프레드페리 셔츠는 매장 벽면을 비롯해 곳곳에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카디건과 옥스퍼드 셔츠도 존재감을 드러냈고요. 국내에서 브랜드의 시작점이었던 슈즈도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매장 곳곳에서 지난 70년간 브랜드의 영감이 된 아티스트의 작업물도 발견할 수 있었고요.
스포츠와 패션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진 자유롭고 에너지 넘치는 공간, 플래그십 스토어의 지향점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DJ 컨트롤러까지 마련한 이유겠죠. 프레드페리는 여러 뮤지션을 초청해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는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봄엔 70주년을 기념한 DJ 라이브 세션을 한 달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진행하기도 했죠.
기개로 증명된 월계관의 무게
출처 : Fred Perry
방적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상류층이 즐기던 스포츠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던 프레드 페리. 코트 안과 밖에서 겸손함보단 자신감을 내비쳤던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좋은 선수가 되길 열망하지 않았지만 챔피언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력으로 증명했고 월계관을 가슴에 달았습니다.
출처 : Fred Perry
정통보다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트렌드에 가벼이 편승하지 않고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일관되게 계승해 온 프레드페리. 명예와 영광을 얻은 자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유행을 좇는 무맥(無脈)에 지쳤다면 프레드페리는 어떤가요? 화이트 스니커즈 열풍 이전부터 이곳의 클래식한 스니커즈를 고수해 온 이들부터 여름이면 프레드페리 셔츠를 즐기는 마니아들이 월계관의 무게가 아닌 낭만을 가슴에 품는 것처럼요.
이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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