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손을 턴 전구 시장,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07년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서 백열전구 퇴출 권고가 결의됐습니다. 에너지 낭비주범으로 꼽히면서죠. 이듬해 정부는 2014년부터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과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합니다. 모든 전구업체들이 LED로 돌아설 때, ‘일광전구’만이 버텨냈습니다. 지난 1962년 대구에서 시작해 백열전구 한 길만 걸어온 김홍도 일광전구 대표는 에디슨도 넘보지 못한 디자인에 회사의 명운을 겁니다.
최후의 백열전구
출처 : 일광전구
2013년 김 대표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권순만 Zerosixfour 대표(현 일광전구 디자인 팀장 겸임)에게 전구 패키지 디자인을 의뢰합니다. 권 팀장은 백열전구가 LP판, 손편지 등 아날로그 감성과 결이 닮았다고 보았죠.
나아가 전구를 활용한 하이엔드 조명 시장의 흐름을 감지합니다. 그는 패키지가 아니라 일광전구 자체의 리브랜딩이 필요하다고 설득합니다. 겉만 화려해봤자 흥행은 잠시니까요.
2014 GOOD DESIGN AWARDS에서 수상한 패키지_출처 : 일광전구
예상했던 것처럼 긴 시간 회사에 몸 담은 이들에게 변화는 낯설었습니다. 일광전구는 50여년 간 B2B(기업 간 거래) 사업만 하며 오직 원가, 효율, 생산성만을 고려해왔죠. 권 팀장은 리브랜딩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브랜드 리뉴얼 제안서를 20건이나 제출했죠.
그는 디자인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일본 ‘굿 디자인 어워드’에 리뉴얼한 패키지를 출품합니다. 전구 회사로는 세계 최초로 수상했죠. 첫 번째 디자인에 대한 대가는 50만 원이었습니다. 권 팀장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광전구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었죠.
기본 라인인 C(Classic)만 종류가 20가지이다_출처 : 일광전구
2014년 권 팀장은 브랜드 총괄 디렉터로 영입되며 본격적인 리뉴얼을 이어갑니다. 예컨대 300여 가지가 넘는 전구 종류를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C(클래식), D(장식용), P(파티용)로 분류합니다. 제품이 C급이냐는 말부터 알파벳 A가 가장 좋지 않냐는 등 직원들의 불평이 이어졌죠. 그는 내부 인력을 설득해온 7년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빗댈 정도로 고행이었다고 말합니다. 브랜드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내부적으로도 리브랜딩에 대한 합의가 모아졌죠.
그는 구매력이 있는 3040 세대는 물론 바이럴 확산이 잘 일어나는 20대를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일광전구를 알리기 위해 생성한 페이스북 계정은 순식간에 1만 5000명의 팔로우를 모았습니다. 국내 최후의 백열전구 회사로 알려지며 이목을 끈 덕분이죠.
라이프리빙샵에 입점하며 오프라인에서도 전구의 미학을 전합니다. 홍대 오브젝트가 그 출발점이었는데요. 권 팀장이 입점 제안서를 보내자 전시를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역제안이 왔습니다.
국내 최초로 수십 개의 전구가 연결된 파티용 제품을 소개했다_출처 : 일광전구
마케팅 팀도 없던 기업에 마케팅 비용을 요구하기는 어렵죠. 권 팀장은 오브젝트 매장에 쓰일 테이블 하나만 마련하고 본사 공장에서 직접 전구를 골라와 소박한 전시를 열었습니다. 당시 차별화가 유행이던 홍대 감성과 맞물린 덕분에 20대 고객들이 지갑을 열었죠. 디자이너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오롯이 혼자만의 열정으로 빚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도전 정신은 제주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장선우 감독의 카페로 유명한 ‘물고기(현재는 폐업)’에 파티용 전구를 설치했죠. 김 대표가 해외에서 발견하고 국내 최초로 들여온 제품으로 현재는 직접 디자인해서 생산합니다. 권 팀장이 시공까지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되 사진만 찍어가 마케팅에 활용했죠. 서울의 가로수길과 해방촌 등지의 야외 카페에도 설치했습니다.
고객들이 먼저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홍보 효과가 커졌습니다. 마침 2010년대 중반 카페 붐이 일면서 전구 인테리어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효율 좋은 마케팅을 이끌어냈죠. 전구의 특성과도 비슷하네요.
헤리티지를 지켜라
아우디 신차 공개 행사장을 장식했다_출처 : 일광전구
M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트렌디하게 변화해가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권 팀장은 “리브랜딩은 고유의 헤리티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유행하는 밈(Meme),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단발적인 매출 상승은 발생해도 장기전으로 갈 수 없다는 분석입니다. 업종, 기업 이미지를 무시한 휘발성 강한 마케팅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일광전구가 소통에 방점을 찍고 마케팅을 이어온 까닭입니다. 디자인만 바꾸는 것은 껍데기에만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백열전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아날로그 감성을 효과적으로 전할 방법을 고민했죠. 전시나 페스티벌에 접목해 오프라인 경험 기회를 넓히는 방법을 택합니다. 2015년 그랜드민트 페스티벌 야외무대 관객석 주변을 전구로 꾸며 인디밴드 곡과 어우러지는 낭만을 연출했죠. 2018년 아우디 신차 공개 행사에선 전구도 힙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킵니다.
인천에 위치한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 출처 : 일광전구
특유의 노랗고 따스한 빛을 활용해 오래된 공간을 개조하기도 합니다. 부산 구 백제병원, 서울 합정동 카페 앤트러사이트가 대표적이죠. 낡은 건물과 버려진 공장터에 백열전구를 오브제로 더해 환히 밝힙니다. 인천 개항로의 폐업한 산부인과를 직접 리모델링해서 2019년 쇼룸이자 카페인 ‘라이트하우스’도 열었습니다. 일광전구 쇼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고객들의 요청에 힘입었죠.
착실히 브랜드를 쇄신해갔지만 실적이 문제였습니다. 후발 주자들이 유사한 제품을 수입해 더 싸게 판매하며 경쟁이 치열해지고 판매량도 줄었죠. 1만 5000원짜리 제품이 5000원까지 가격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매년 나가던 서울리빙디자인페어(리빙페어)에서도 위기를 실감했습니다. 2019년도에는 매출 규모가 인기가 많던 때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회사는 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지막 전구 회사는 이대로 문을 닫는 걸까요?
1962
일광전구공업사 창립
1986
주식회사일광 법인 전환
2013
일광전구 브랜드 리뉴얼
2014
파티용 조명기구 P1 출시
2021
조명 가구 브랜드IK 출범
일광전구공업사 창립
주식회사일광 법인 전환
일광전구 브랜드 리뉴얼
파티용 조명기구 P1 출시
조명 가구 브랜드IK 출범
낮밤없이 아름다우리
조명 라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제품 ‘스노우맨’_출처 : 일광전구
2021년 김 대표의 아들 김시연 씨가 마케팅팀을 신설하고 팀장으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젊은 피가 수혈되자 회사 창립 이후 처음으로 마케팅 예산도 집행되죠. 김 팀장과 권 디렉터는 일광전구가 생존하려면 전구가 아닌 ‘조명’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조명은 마진율이 낮은 전구보다 사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성비로 승부하는 전구와 달리 디자인에 따라 충분히 하이엔드 시장으로 진입할 수도 있죠. 2019년 이미 조명을 제작해 셀렉트샵 29CM에 입점한 전적이 있지만 당시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이번에는 조명 가구 브랜드 IK를 출범하며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권 팀장은 정말 ‘마지막’이란 각오였다고 말합니다.
2021 리빙페어에 조명 6종을 출시합니다. 예산이 한정적인 탓에 갓의 모양만 다르고 스탠드는 동일한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죠. 이목은 끌었지만 예약률은 저조했습니다. 참담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죠. 다행히 두어 달이 지나자 주문이 서서히 늘어났습니다. 현장에서 고민하던 고객들이 하나 둘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사이 온라인 몰에 입점한 영향도 있었습니다. 같은 해 연말에는 일광전구의 최고 인기 제품 ‘스노우맨’도 출시합니다.
권 디렉터의 최애 제품. 리브랜딩을 외친 7년을 정리하는 의미를 담았다_출처 : 일광전구
일광전구는 백열전구가 퇴출되고 경쟁사가 난립하는 가운데서도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새로 진출한 조명 시장에서도 입지를 넓혀가죠. 이제 세라믹 브랜드 ‘오덴세’, 인스턴트 원두커피 브랜드 ‘맥심 카누’ 등 조명과 무관한 업종에서도 러브콜이 들어옵니다. 권 팀장은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시기도 있었지만 한번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산업 자체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였기에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국내 조명 시장은 저가형 제품과 하이엔드 조명으로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일광전구는 60년간 쌓아온 빛에 대한 노하우를 기반으로 중간 지점을 공략하겠다는 목표입니다. 권 팀장은 "조명은 단지 빛을 밝히는 오브제가 아니다"면서 "낮에도 밤에도 아름다워야 하는 제품"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를 더 친숙하게 만드는 것이 IK의 과제라는 설명이죠. 이를 위해 조명을 직접 만드는 어린이 체험 키트,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도록 부품별 판매 등 다양한 방법을 고안 중입니다.
백열전구를 마지막까지 밝혀온 일광전구. 이제는 IK로서 그 빛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낼 조명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일광이 그러했듯이 IK로 빚어낼 새로운 혁신에 기대가 모아집니다.
조지윤
info@buybran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