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 사치가 된 세상입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가 더는 유머가 아닌 다큐가 된 세상 속에서 ‘쉬어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호랑이가 있습니다. 뚱뚱한 호랑이, ‘뚱랑이’인데요. 위엄 있는 전통적인 호랑이 상과는 달리 늘어져서 뒹굴뒹굴하는 뚱랑이를 보며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2018년 5월 문을 연 일러스트 브랜드 ‘무직타이거’는 뚱랑이를 통해 현대인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쉼’이 흠이 아니라고 말하는 뚱랑이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2030 직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고 하지만 정작 사직서를 내고 쿨하게 회사를 떠나기는 어렵습니다. 회사는 전쟁터고 밖은 지옥이라는 말 때문일까요.
송의섭 무직타이거 대표는 이런 말이 무색하게, 2018년 8년째 일하던 회사에 사직서를 냅니다. 직장을 벗어나 나만의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였죠. 마찬가지로 현대모비스에서 GUI(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로 근무 중이던 아내 배진영 무직타이거 대표도 함께 일을 그만뒀습니다. 퇴사 전부터 1일 1드로잉을 하며 어떤 일러스트를 그려갈지 고민하던 둘은 2018년 5월 일러스트 브랜드 ‘무직타이거’를 만듭니다. 고민이 결실을 본 순간이었죠.
직장이 없다는 뜻의 무직(無職)과 영어 단어로 표현한 호랑이(Tiger)를 조합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옅어진 세상 속에서, 스스로가 정의하는 자신만의 일을 하는 모든 ‘무직’들을 응원한다는 의미를 담아냈죠.
무직타이거가 ‘호랑이’를 말하는 이유
무직타이거의 초기 제품 중 하나. 초기엔 다양한 호랑이 일러스트를 그렸다_출처 : 무직타이거
송 대표는 처음엔 ‘어떤’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을 현대에 맞게 디자인으로 풀어가고 싶다는 소망은 확실했습니다. 송 대표는 현대자동차에서 외관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다 보니 해외 곳곳의 디자인 센터와 협업, 경쟁할 기회가 많았죠.
그때, 한국적인 콘셉트를 강조한 디자인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외국인 디자이너 친구가 ‘한국적인 것을 세련되게 나타낸 기념품이 있냐’고 물었을 때, 말문이 막혔던 기억도 한몫했습니다. 딱 떠오르는 게 없다면 내가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죠.
송 대표는 처음엔 동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일러스트를 그리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다가 민화를 접하고, 호랑이가 단골 소재로 쓰였다는 점을 찾아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전부터 호랑이를 산군, 산신령으로 부를 만큼 경외하는 한편 민화나 전래동화에선 울상을 짓거나 혼나기도 하는 친근한 이미지로 그려졌죠. 88올림픽의 호돌이와 평창 동계올림픽의 수호랑도 호랑이 캐릭터일 정도로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하고 애정 어린 동물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의 대표 캐릭터인 ‘뚱랑이’처럼 귀엽게 디자인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민화 느낌의 강렬한 호랑이 일러스트에 주력했죠. 제품도 일러스트를 패턴화한 리빙 제품이 주를 이뤘습니다. 2018년 5월 라이프스타일 컨벤션 ‘CJ 올리브콘’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무직타이거의 대표 캐릭터인 뚱랑이_출처 : 무직타이거
쿠션, 패브릭 등 리빙 제품의 인기는 높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한 번 사면 오래 쓰는 리빙 제품의 특성상 재구매율이 낮았던 것입니다. 리빙 제품은 최소 발주 수량도 높고 만드는 데 시간도 4~6개월이 걸렸습니다. 1일 1드로잉을 하며 매번 새로운 일러스트를 그리는 무직타이거 입장에선 다양한 디자인을 빨리 접목해 만들기 어려웠죠.
소량으로 빨리 생산할 수 있는 휴대폰 케이스 등 잡화류로 피보팅(외부 환경으로 사업 환경을 바꾸는 것) 한 이유입니다. 디자인도 보다 귀엽고 캐릭터스러운 방향으로 바꿨죠. 이 같은 배경 속에서 2019년 5월 뚱랑이의 초기 디자인이 된 ‘lazy tiger’라는 캐릭터가 태어났습니다. 통통하고 축 늘어진 모습의 호랑이었죠. 그런데 이 캐릭터에 대한 반응이 유달리 좋았습니다. SNS 반응은 물론이고 이 디자인을 적용한 제품이 다른 제품들보다 2~3배 가까이 많이 팔렸죠.
송 대표는 ‘뭔가 있다’라는 생각에 보다 더 통통하고, 게으르게 표현했는데 반응이 더욱 열렬했습니다. 만사가 귀찮은 듯한 뚱한 얼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발, 잔뜩 늘어져 행복을 만끽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죠. 뚱뚱한 호랑이라며 고객이 댓글로 ‘뚱랑이’라고 불러준 덕분에 이름도 뚱랑이로 새롭게 지었습니다. 뚱랑이 이후에도 ‘판타지 타이거’ 등 다양한 호랑이 일러스트 작업을 이어갔지만 2020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뚱랑이 집중화 전략을 채택합니다. 다른 호랑이 캐릭터들이 뚱랑이 캐릭터 이미지와 상충될까봐 집중을 한 것이죠.
현대인 마음 사로잡은 메시지
출처 : 무직타이거
송 대표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고객들의 반응은 물론이고 기업들도 협업을 할 때에 뚱랑이와 함께 하기를 원했죠. 2019년 8월 후지필름 코리아와의 첫 협업 이후로 자동차부터 화장품, 유아용품, 패션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러브콜이 이어졌죠. 2022년 2월 기준 해외 브랜드를 포함해 협업한 브랜드 수가 100여 개에 이를 정도입니다.
무직타이거의 협업 기준은 브랜드의 감도와 방향성이 서로 맞는지입니다. 무직타이거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쉬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뚱랑이의 주요 팬층인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현대인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죠. 2030이 즐겨 마시는 맥주부터, 아이를 기르는 2030을 위한 유아 용품까지 협업을 이어가는 이유입니다. 단, 아무리 규모 있는 브랜드라도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면 협업을 거절합니다.
협업을 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SPA 패션 브랜드 스파오와 잠옷을 만들거나 IBK 기업은행과 제휴해 카드를 만드는 것처럼 기존 브랜드 제품에 뚱랑이 디자인을 입히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홍콩의 대표적인 쇼핑 구역 랭함 플레이스에 팝업스토어를 열기도 했죠.
송 대표는 그중 명품 브랜드 구찌와의 협업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구찌 제품을 착용한 뚱랑이 이모티콘은 배포 5시간 만에 60만 회 다운로드를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배 대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이기도 해서 마치 ‘성덕’이 된 기분도 들었죠.
무직타이거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셀프 칭찬’ 등을 독려한다_출처 : 무직타이거
무직타이거가, 그리고 뚱랑이가 대중과 기업을 사로잡은 이유는 단지 귀여운 디자인 때문만은 아닙니다. 뚱랑이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가 현대인의 마음을 울려서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드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뚱랑이는 오히려 느긋하게 누워 뒹굴뒹굴하고, 조금 쉬어가면 어떠냐고 되묻습니다. 송 대표는 뚱랑이의 인기 요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뚱랑이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캐릭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공감하고 힐링 받는 것 같아요. 직장인들은 ‘너라도 대신 쉬어줘서 고맙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대체 만족을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정작 뚱랑이에 이런 스토리를 부여한 것은 뚱랑구(뚱랑이 팬들을 부르는 애칭)들이었다고 하는데요. 무직타이거는 처음에는 뚱랑이에 스토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더 통통하고 게으르게 그릴수록 좋아하고,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다며 말하는 뚱랑구들의 반응을 보고 무직타이거는 뚱랑이의 구체적인 성격을 덧붙여갔죠.
송 대표는 이제 뚱랑이가 살아 숨쉬는 느낌을 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뚱랑구들과의 활발한 소통이 필수죠. 무직타이거는 SNS에 1일 1업로드를 합니다. 뚱랑구는 매일 친구와 대화하듯 뚱랑구들에게 말을 걸죠. 예컨대 ‘뚱랑구들은 무슨 라면 제일 좋아하냥구’, ‘연휴가 끝난 거지 세상이 끝난 건 아니랑구’처럼 특유의 말투로 말을 겁니다. 뚱랑구들의 취향을 파악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말도 건네죠.
2018.05
무직타이거 브랜드 출시
2019.05
뚱랑이 캐릭터 탄생
2019.08
첫 번째 협업 성사 (후지필름)
2021.12
인스타그램 팔로워 10만 돌파
2022.01
스튜디오 무직 법인 설립
무직타이거 브랜드 출시
뚱랑이 캐릭터 탄생
첫 번째 협업 성사 (후지필름)
인스타그램 팔로워 10만 돌파
스튜디오 무직 법인 설립
하고픈 일을 자유롭게 하는 무직!
석촌호수에 전시된 거대 뚱랑이 조형물_출처 : 무직타이거
지친 마음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걸까요, 혹은 귀여운 뚱랑이의 모습이 세계에 통한 걸까요. 무직타이거는 해외에서도 조금씩 이름을 알려갑니다. 2022년 2월 기준 홈페이지 트래픽의 15%가량은 중국, 홍콩, 일본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죠. 설날, 정월대보름 등 동아시아 전통 명절에 맞춰 뚱랑이 일러스트를 그리다 보니 동양권 국가에서 반응이 큰 편입니다. 무직타이거는 팬데믹이 진정되고, 해외 배송이 안정되면 미국, 유럽으로도 진출할 계획입니다.
사업도 다각화할 계획입니다. 현재는 굿즈 판매,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 등이 주요 수익 창구지만 콘텐츠 사업으로도 넘어갈 틈을 보고 있죠. 2022년 1월 문화 콘텐츠 전문 기업 대원미디어가 무직타이거의 공동 원작자로 합류합니다. 단순한 유통 제휴 수준을 넘어 무직타이거의 IP를 활용해 상품 및 콘텐츠를 공동 개발하는 것인데요. 2월에는 중국 대표 플랫폼 기업 알리바바와 함께 무직타이거 관련 협업을 추진한다고 밝혀 그 성장 가능성에 기대가 모아집니다.
출처 : 무직타이거
2022년 임인년을 맞아 호랑이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직타이거도 분주해졌습니다. 뚱랑이는 우리에게 ‘쉬어도 괜찮아’라고 말하지만 정작 뚱랑이가 가장 바쁜(!) 아이러니한 모습이네요. 하지만 뚱랑이는 사실 마냥 띵가띵가 노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되 열정적이기를 말한다는 점, 알고 계셨나요?
“다들 너무 빡빡하게 살려고 해요. 회사를 다니면서 항상 느끼기도 했고, 사실 저도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무직타이거를 만들었는데요. 쉬어도 괜찮은 거고, 자유로울 수도 있는 거니 너무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열정적으로, 대신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에 맞춰서 천천히 해갔으면 좋겠어요.”
송 대표는 정해진 직장은 없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은 있어서 원하는 일에 몰두하는 힘을 기르길 바란다고 말해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뚱랑이처럼 우리들도 잠시 쉬어가도 언제든 괜찮다고 말이죠.
조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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