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쓰레기가 ‘쓰레기’로 안 보일 걸요?
기자는 요즘 페트병을 버릴 때 분리수거장이 아닌 ‘네프론’을 찾습니다. 자판기를 닮은 순환자원 회수로봇인데요. 버튼을 누르고 라벨을 뗀 페트병을 구멍에 집어 넣자 심사를 진행합니다. 재활용 가능한 폐기물인지 확인하는 작업인데 다행히 합격점을 받았네요. 연락처를 입력하니 10원이 적립됩니다. 쓰레기도 버리고 돈도 벌다니 일석이조.
네프론을 운영하는 곳은 산업용 로봇 스타트업 ‘수퍼빈’. 2015년 6월에 문을 연 이후 현재까지 페트병 약 9800만 개, 캔 약 4800만 개를 처리했습니다. 이곳은 폐기물을 재활용 원료로 가공해서 생산자(기업)가 돈을 주고 다시 사가는 ‘순환경제’ 구축을 꿈꾸는데요. 창업 7년만에 한국 기업 최초로 환경 노벨상이라 불리는 ‘어스샷’ 최종 후보에 오른 저력이 무엇이길래.
쓰레기 대란, 멈춰!
시민들이 네프론을 실사용하는 모습_출처 : 수퍼빈
플라스틱 분리 배출은 일상입니다. 음료 페트병 라벨을 떼고 배달 용기는 세척해서 내놓는 일은 자연스럽죠. 이런 노력에도 실제 재활용 비율은 높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서울환경연합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 중 물질 재활용이 되는 비율은 30~40% 정도로 추정됩니다. 분리 배출 과정에서 PET, PP 등 소재를 분류하지 않고 수거 과정에서 여러 폐기물이 섞이면서 오염되기 때문이죠.
김정빈 수퍼빈 대표가 철강회사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박차고 나와 수퍼빈을 창업한 계기입니다. 폐기물 처리 사업을 구상해 쓰레기 대란을 해소하고자 했죠. 기존 재활용 업체는 대부분 컨베이어벨트를 설치하고 사람이 육안으로 재활용품을 골라내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문제는 선별장 환경이 열악할 뿐더러 비용도 많이 들고 깨끗한 소재를 분류하는 것도 어렵죠.
수퍼빈은 인공지능(AI) 기술을 떠올립니다. 로봇 ‘휴보’가 3D 물체를 인식하는 기술을 카이스트로부터 이전 받아 AI 알고리즘 ‘뉴로지니’를 개발했죠. 사용자가 네프론에 캔·페트병을 넣으면 뉴로지니를 적용한 카메라가 재활용 가능한 폐품을 선별하고 종류별로 분류합니다. 오염이 심하거나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로 인식하면 다시 배출하죠. 검열된 폐기물만 수거해서 분리 배출보다 재활용률도 높습니다. 데이터가 점점 쌓이면서 정확도는 99% 수준입니다.
앱에서 적립 포인트를 확인하고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_출처 : 수퍼빈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겠죠.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적립금 제도를 고안합니다. 캔· 투명 페트병 개당 10원의 포인트를 적립해주고 2000원 이상이 쌓이면 계좌이체를 해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죠. 올 10월 기준 네프론 활성 이용자 수는 5만 5000명에 달하는데요. 월 평균 보상액도 약 8000만 원 수준입니다.
단, 1인당 하루에 넣을 수 있는 폐기물의 수는 30개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이상을 배출하고 싶은 경우에는 ‘수퍼모아’ 서비스를 신청하면 필드매니저가 직접 회수해 갑니다. 기기 한 대 당 수거량은 페트병을 기준으로 500개인데 하루면 가득 찬다고 합니다. 기자도 아침 7시에 방문했는데 이용에 실패한 기억이 있네요.
수퍼빈은 지난 2016년부터 경기도 과천시를 시작으로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네프론 보급에 나섭니다. 올 10월 기준 전국적으로 604대를 운영 중이죠. B2G뿐만 아니라 B2B로도 확장해 갑니다. 삼성디스플레이, SK이노베이션 등은 사옥에 설치해 ESG 경영에 일조합니다.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과 손잡고 배달용기의 플라스틱 뚜껑을 회수하는 네프론도 개발했죠. 네이버는 직원이 네프론을 이용하면 포인트로 기부하는 방식으로 응용합니다. ‘수거’가 끝났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코카콜라도 필요하대
코카콜라는 순수 재활용 페트 소재 rPET를 사용한 제품을 선보인다_출처 : 코카콜라
“폐기물의 밸류 체인은 ‘수집선별 – 물류 – 가공’ 3단계로 나뉘는데 한 업체가 3개의 밸류체인을 완성한 사례는 세계 최초죠”(김 대표).
전 세계적으로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생산자(기업)가 제품을 포장·판매해서 이익을 얻는 만큼 생산한 폐기물에 대해 재활용까지 책임지는 생산자책임재활용(EPR) 제도가 도입되기 때문이죠.
유럽연합은 2025년까지 음료 페트병의 25% 이상, 2030년까지 음료 플라스틱 용기의 30% 이상을 재생원료로 만들도록 의무화하는 정책을 추진 중입니다. 코카콜라는 2030년까지 모든 포장재에 재생원료를 50% 이상 사용하겠다고 밝히고 펩시코도 같은 해까지 플라스틱 포장재에 재생원료를 절반까지 사용하겠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이는 수퍼빈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순환경제(제품 사용후 폐기 대신 재활용되며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폐기물을 생산자가 되사갈 수 있도록 플레이크(폐플라스틱을 세척, 분쇄한 조각)와 펠릿(알갱이 형태의 재활용 원료)을 제작하고자 하는 이유죠. 파타고니아나 아일린 피셔 같은 의류회사가 자사 옷을 수거해서 세척해 재판매하거나 아예 새로운 옷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플레이크는 투명도가 높고 이물질이 없을수록 재활용이 수월하다_출처 : 수퍼빈
수거된 폐기물은 선별장으로 옮겨져 직육면체 모양으로 압축됩니다. 이 과정에서 물류 비용을 줄이기 위해 트럭에서 바로 압축하면서 실을 수 있는 ‘특장차’도 개발 중이죠. 이후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자체 플레이크 소재화 공장 ‘아이엠 팩토리’에 보내는데요. 내년까지 펠릿 공정도 반영해 연간 2만t의 고부가가치 재활용 소재를 생산할 계획이죠. 전북 순창에도 화성 공장의 3배 규모의 공장을 설립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도시에 순환자원 회수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도시에서 생산된 폐기물이 소각·매립장까지 가지 않게 하는 것이죠. 김 대표가 "도시 밖으로 폐기물이 누적배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회사를 꿈꾼다"고 말하는 이유이죠. 네프론을 바닥이나 벽 어디든 설치해 폐품을 도시 내에서 순환자원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이미 LH(한국토지주택공사)와 손잡고 3기 신도시에 자원 순환 시설을 도입하고 있죠.
수퍼빈은 이런 비전을 인정받아 지난 10월 180억 원 규모 시리즈 B 후속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누적 투자유치 금액은 410억 원, 기업가치는 1830억 원대로 평가받았죠.
2015.06
수퍼빈 주식회사 설립
2016.08
네프론 시제품 출시
2018.04
기획재정부 선정 혁신기업
2019.10
이동형 네프론 수퍼큐브 출시
2022.04
시리즈 B Bridge 투자 유치
수퍼빈 주식회사 설립
네프론 시제품 출시
기획재정부 선정 혁신기업
이동형 네프론 수퍼큐브 출시
시리즈 B Bridge 투자 유치
러닝동호회처럼, 팬덤 필요
어린이들이 직접 그린 환경 보호 그림으로 랩핑한 네프론_출처 : 수퍼빈
수퍼빈의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업의 핵심 가치, 즉 순환경제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야 합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일부’가 아니더라도 기꺼이 폐기물을 재활용하려는 이들이 많아져야 해서죠.
네프론을 간판으로 내세워 각종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는 배경입니다. 쓰레기마트가 대표적이죠. 캔과 페트를 네프론에 넣으면 현금 포인트로 전환해주고, 이를 이용해 마트 내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방식입니다. 팝업스토어 형태로 쓰레기카페, 쓰레기미술관도 열었습니다. B2G나 B2B 모델을 가진 테크 기업이 브랜딩에 힘쓰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색다른 도전입니다.
‘찐팬’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요. 초기에는 돈만 벌기 위해 유입되는 이용자가 많아 난관을 겪었습니다. 네프론을 발로 차거나 쓰레기를 버려두고 가는 경우가 많았죠. 기업 가치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이들이 필요했습니다.
문화 활동을 이어가면서 팬덤이 차곡차곡 늘어났죠. 플로깅(시간과 장소 제약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쓰레기를 줍는 것) 후에 네프론에 쓰레기를 버리는 모임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포리 브랜딩실 이사는 “네프론이 꽉 차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정도로 적극적인 이용자가 늘었다”면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브랜드의 페르소나가 점차 구축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수퍼빈의 ‘찐팬’을 자처하며 플로깅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_출처 : 수퍼빈
이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확산해가고자 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습니다. K2는 하이킹을 하며 자연 속 버려진 쓰레기를 ‘클린백’에 담아오는 캠페인을 엽니다. 이니스프리 역시 화장품 용기 수거에 적극적으로 나서죠. 김 대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빚을 수 있는 최상의 가치가 ‘문화’라고 강조합니다.
수퍼빈은 무엇을 만들었냐고 되묻자 ‘무라벨 트렌드’에 기여했다는 답이 돌아오네요. 라벨이 재활용에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데이터로 꾸준히 증명해 오면서죠. 이후 생수회사들이 수분리 라벨부터 무라벨까지 바꾸는 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한참을 고민하던 김 대표의 입에선 예상 밖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후 위기를 직면한 시점에서 어른들은 죄책감을 갖고 다음 세대를 위해 개선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환경은 황폐화 됐지만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않으면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 수 있으니까요.”
조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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