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탕아? 트론: 새로운 시작
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화려한 비주얼과 이를 압도하는 사운드. ‘트론: 새로운 시작’을 압축한다면 이보다 정확한 문장은 없을 거예요. 문제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많은 이가 동의할 이 평가에 사심을 보태보려고 합니다.
잇지 못한 원작의 아우라
이 영화, 처음 들어본다고요? 대부분 그럴 거예요. 사실상 프랜차이즈에 실패했지만 다시 꺼내든 이유가 있습니다.
‘트론: 새로운 시작’은 1982년 개봉한 ‘트론’의 속편입니다. 원작은 당시 큰 호응을 얻진 못했지만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가상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널리 퍼지기도 전에 환상적인 비주얼로 시각화했기 때문이죠. 인터넷과 노트북도 없던 시대에 말입니다.
28년 만에 디즈니를 대표할 새로운 프랜차이즈로 선택받은 이유입니다. 감독의 이력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당시 영화를 찍어본 적 없는 뉴페이스였는데 광고판에선 유명했습니다. 참고로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연출한 마이클 베이 감독과 ‘새벽의 저주’로 데뷔한 잭 스나이더 감독 역시 상업 광고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처럼 광고로 이름을 알린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세련되고 간결한 시각적 배치와 감각적인 장면 연출로 주목받았습니다. 영화에선 이런 것을 미장센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방법이죠. ‘트론: 새로운 시작’은 그 당시 기술로 제작될 수 있는 최고의 해상도로 완성됐는데, 35mm 렌즈와 풀 35mm 칩 카메라로 촬영한 최초의 3D 영화입니다. 감독의 성향과 촬영 방법으로 미루어 볼 때 비주얼은 속편에서도 이어지는 핵심 가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디지털 그리드_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렇다고 해도 영화를 비주얼로만 채울 순 없죠. 광고가 아니니까요. 몰입해서 세계관에 빠져들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하죠. 여기서 ‘트론: 새로운 시작’의 약점이 드러납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불친절합니다. 속편임을 감안하더라도 트론의 세계관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유저와 프로그램의 구분을 비롯해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이 부족할뿐더러 이야기의 흐름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영화 ‘듄’이 친절하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영화 주제도 올드합니다. 지루하다는 거죠. 2010년에 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되는 디스토피아는 새로울 것 없는 ‘The same old story’입니다. ‘反 디지털 정서’를 담은 메시지도 타이밍이 좋지 않습니다. IT 산업이 고도로 성장하면서 최첨단 기술로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할 수 있었을까요? 28년만에 돌아온 속편이 원작의 현대적인 재해석이 아니라 답습에 그친 점은 아쉽습니다.
눈르가즘과 귀르가즘만 합격
영화의 약점이 뚜렷한 만큼 강점도 명확합니다. 어둠과 빛의 대비가 돋보이는 디지털 그리드를 배경으로 화려한 영상이 펼쳐지죠. 일렉트릭 라이트 슈트와 헬멧은 물론이고 라이트 사이클과 라이트 제트 모두 매끄러운 디자인을 뽐내죠.
12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유효한 디자인은 다니엘 사이먼의 손길을 거쳤습니다. ‘트론: 새로운 시작’에 등장하는 ‘탈 것’을 창조한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 출신입니다. 폭스바겐 그룹에서 경력을 시작했죠. 다니엘 사이먼은 간결한 실루엣에 강렬한 라이트 그래픽을 더한 비히클로 영화에 시각적인 힘을 실어줍니다. 영화 성적과 별개로 인정받았던 걸까요? 그는 영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에도 수석 비히클 디자이너로 참여합니다.
디지털 그리드 속 케빈 플린의 거처, 영화에 활력을 더한 다프트 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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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그리드 속 케빈 플린의 거처_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웅장한 사운드로 영화에 활력을 더한 다프트 펑크_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에서 디지털 그리드를 창조한 케빈 플린은 특별하게 묘사됩니다. 마치 신처럼 말이죠. 이는 그가 거주하는 공간과 옷차림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건축학을 공부한 감독답게 공간과 소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미니멀한 공간을 클래식한 샹들리에 조명과 식탁, 의자로 채워 과거와 미래의 혼재를 보여줍니다. 또한 의상과 바둑판 같은 소품을 통해선 동양의 문화까지 아우릅니다. 서로 상반되는 요소를 가지고 비주얼을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거죠.
시쳇말로 ‘귀르가즘’도 채워줍니다. 프렌치 일렉트로닉 뮤직 듀오 ‘다프트 펑크’가 영화 음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미 어워드 수상내역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이 되는 전설적인 듀오의 음악은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전자음으로 장면마다 역동성을 더하는가 하면 빛에 익숙해져 지루해질 때 쯤 강렬한 비트로 분위기를 환기하기도 합니다. 특히 영화 속 클럽 ‘End of line’에서 재생되는 배경음악 ‘Derezzed’는 액션신과 맞물려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전달합니다.
새로울 건 없지만 영화의 메시지도 지금에서야 알맞은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파괴를 서슴지 않고, 불완전한 존재를 없애려고 현실로 넘어가려는 악당에게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만류하는 창조주의 모습은 지금 더 와닿습니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는 매우 효율적이죠. 하나가 맞는다면 다른 하나는 맞지 않는 거니까요. 맞는 것만 한다면 완벽함에 이를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런 생각이 우선시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은 창조 계급이 이끌어가는 시대잖아요.
마블 세계관 수립의 혁혁한 공
전 세계적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4억 달러(약 5000억 원) 정도라고 하는데, 새로운 프랜차이즈로 이어가기엔 부족한 수치였을 겁니다. 트론 프랜차이즈 실패를 스타워즈로 대체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 정도니까요. 세 번째 트론 영화의 행방이 묘연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비주얼과 웅장한 사운드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순 있어도, 팬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마냥 유쾌하던 아이언맨도 3편을 기점으로 달라졌잖아요. 존재에 대한 고뇌에 빠진 아이언맨 덕분에 어벤저스의 이야기도 한층 깊어졌고요. 2편에서 더 나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환골탈태한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론: 새로운 시작’ 이후의 변화입니다.
마블의 솔로 영화들이 탄탄해지면서 이들이 한 데 모이는 어벤저스는 탄력을 받았고 마블 세계관도 더욱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마블의 성공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을 테고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트론의 교훈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디즈니의 SF 영화 ‘투모로우랜드’는 2010년 이후에 개봉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니까요.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 트론: 새로운 시작, 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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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 시빌워_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트론: 새로운 시작_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1982년 개봉한 원작 트론_자료 협조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관객들은 똑똑해졌지만 여전히 귀찮아한다는 겁니다. 눈요기 그 이상을 원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건 질색하는 거죠. ‘트론: 새로운 시작’의 후속작이 영약해지지 않는다면 트론 시리즈는 실패한 컬트로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컬트 문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트윈 픽스’ 역시 암울한 분위기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난해함으로 초기 팬 흡수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메가폰을 잡은 이는 데이비드 린치. 그는 아름답진 않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로 기괴하면서도 몽환적인 비주얼을 선사하며 호평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스토리의 힘도 있었습니다. 수사물에 머무르지 않고 주변 인물들을 통해 미스터리로 이야기 범위를 넓힌 거죠.
파일럿으로 출발한 ‘트윈 픽스’는 시즌 3까지 이어졌고 인기에 힘입어 극장판도 선보였습니다. 여기서 영감을 받아 게임도 발매됐습니다. 소수의 전유물로 여겨진 컬트 문화의 특성 상 괄목할 만한 성과죠. 난해함을 뛰어넘는 비주얼로 또 다른 문화유산을 잉태한 트윈 픽스.
트론은 트윈 픽스와 다를지도 모릅니다. 다만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트론 시리즈의 명맥이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결과물을 수치로 판단하는 건 예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니까요.
이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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