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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간식, 라멘은 미식’ 이유는?

2022년 한국 수도권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라멘요리_출처 : @hamkkeramenday

2022년 한국에서 라멘은 커뮤니티 푸드입니다. 창작자와 팬이 교감하며 미식의 장을 열고 있어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미식을 찾아서

최근 MZ 세대를 중심으로 파인 다이닝(고급 식당)이 유행한다는 보도가 부쩍 늘었습니다. 한 끼 식사에 수십만 원을 지불하는 스시 오마카세나 오성급 호텔에서 근사한 코스요리를 즐기며 확실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죠.

기자는 사회현상에 함부로 MZ 세대를 끼워 맞추면 곤란하다고 여기는 편입니다. 70년생이나 90년생이나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건 매한가지인데 굳이 세대 구분이 필요한 것인지. 음식 앞에 세대론은 무용합니다. 일단 권위를 지닌 가이드북을 기준 삼아 오늘날 현상을 짚어보죠.

출처 : guide.michelin.com

미쉐린 가이드 서울의 빕 구르망을 살펴봅니다. 매해 특정 지역의 4만 5000원 이하의 미식을 추천하는 미식 명단인데요. 연도별 빕 구르망을 통해 한국의 미식 트렌드를 짚어보는 시도에 나섰습니다. 2022년도 총 61곳의 레스토랑 중 면 요리가 주력인 곳은 25곳으로 전체 비중의 40%를 넘습니다. 한국의 미식에서 면 요리가 차지하는 위상이 대단하네요. 최신 가이드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수년간 누적된 차트를 지켜보니 이국적인 면 요리가 눈에 띕니다. 아시안 누들 푸드를 주제로 한 레스토랑이 계속 빕 구르망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4만 5000원 미만 누들 메뉴 중 가장 평균단가가 낮은 미식을 탐방해보기로 결심합니다. 업체별 주력 메뉴 가격을 살펴보니 ‘라멘 레스토랑’의 가성비가 가장 뛰어나네요. 일본식 라면은 비싸봐야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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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하쿠텐에 진열된 라멘 오브제 _출처 : 바이브랜드

순대 국밥이나 뼈해장국 한 그릇에 거스름돈 없이 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2022년 서울입니다. 단돈 만 원으로 ‘미식’이라는 호칭을 얻어낸 라멘에 흥미가 생기는 이유죠. 심지어 라멘은 지역 내 번화가를 중심으로 업장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집에서 간편하게 조리해먹는 ‘인스턴트 라면’ 외에 새로운 식문화가 번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지네요.

라멘. 간식이 아니라 하나의 식문화 이식으로 다뤄진 일본식 면 요리는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요?

라멘 24시

인천의 대표 번화가인 구월동 로데오거리. 대형상가 1층 중심부에 라멘 가게가 몰려있습니다. 기자는 ‘멘야겐키’라는 곳에 입장. 주방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바(bar) 형’ 테이블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하는 1인 손님이 많았어요. 키오스크에서 ‘시오청탕’ 라멘을 주문합니다. 맑게 우린 돼지 육수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 라멘이라는 설명이 덧붙었죠.

‘일본라멘은 뽀얗고 진한 돼지 돈코츠 라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하동관 곰탕처럼 맑은 육수를 지닌 라멘도 있네요. 돈사골과 돈육을 푹 고아 만든다는 점은 동일한데 어쩜 이리 다른 맛이 나는 걸까요. 이색 메뉴를 만난 김에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라멘 가게의 하루를 지켜봅니다.

청탕라멘

멘야겐키의 청탕라멘_출처 : 바이브랜드

멘야겐키 오너 조영재 사장은 창업 5년 만에 연 직영 2호점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고 합니다. 5년 간 후쿠오카식 돈코츠 라멘을 다루던 1호점(겐키라멘)은 스태프에게 맡기고, 새 가게를 열었죠. 개업 후 6개월째 선보인 청탕(淸湯)라멘이 ‘사서 고생’의 대표 예시라고 하네요. 왜 ‘사서 고생’인지 되물으니 조리 과정의 난감함을 토로합니다. 스프, 타래, 고명 등 요리에 들어갈 식재료에 쏟는 사전 작업이 만만찮다는 설명입니다.

1)멘야겐키 소장 레시피북
신메뉴 출시에 앞서 맛 기준을 잡는 길라잡이라는 설명이다
2)2인 1조 운영에 나선 멘야겐키 오너부부
주문이 없는 시간에는 식자재 준비로 분주하다고 귀띔했다
출처 : 바이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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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야겐키 소장 레시피북. 신메뉴 출시에 앞서 맛 기준을 잡는 길라잡이라는 설명이다_출처 : 바이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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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조 운영에 나선 멘야겐키 오너부부. 주문이 없는 시간에는 식자재 준비로 분주하다고 귀띔했다_출처 : 바이브랜드

“청탕육수는 4일 주기로 만들고 100그릇 분량을 준비해요. 최근 제주산 흑돼지(버크셔) 냉장 뼈를 납품받았는데요. 만족스러운 퀄리티의 스프가 나온 것 같습니다.”

육수 추출이 관건인 청탕라멘은 재료를 고온에 푹 끓이는 백탕(白湯)라멘과 달리 레시피에 맞춰 돈사골육수의 가열 온도를 10시간가량 일정하게 맞춰야 한다고 합니다. 식자재를 납품받으면 간밤에 핏물을 빼고 영업시간 내내 돈사골육수를 추출하지만, 식자재 수급 사정과 판매추이에 사전 식재료생산을 발맞출 수밖에 없어 휴무일이나 새벽에도 업장에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조 씨는 신메뉴를 선보이는 이유를 ‘생존’과 ‘식문화’라고 설명합니다. 코로나 시기에 라멘 가게를 찾는 1~2인 손님이 늘었고 그중 이색 메뉴를 능동적으로 찾아서 소비하는 고객이 크게 늘었다는데요. 그는 일본 현지의 조리방식을 재현하되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현지화를 성공시킨 이색 라멘이 앞으로 대세일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단골이 브랜딩 돕네

2022년 4월 수도권 라멘 마니아들은 도장을 찍느라 분주했습니다. ‘함께라멘데이’라는 기간 한정 이벤트가 열렸거든요. 수도권 라멘 가게 56곳에서 식사를 하고 업장별 스탬프를 9개 모으면 총 500명에게 굿즈(면기, 티셔츠, 키링)를 증정하는 이벤트였죠. 한국라멘씬을 사랑하는 팬들이 모여 만든 행사로 큰 인기를 얻었어요. ‘2022 함께라멘데이’를 이끈 한성웅(28)씨를 만나 속 사정을 들어봤습니다.

수도권 내 자가육수 제조 라멘가게를 정리한 지도_출처 : @hamkkeramenday

“일본 불매운동과 팬데믹을 거치며 폐업한 라멘 가게가 많아서 아쉽게 생각했어요. 귀한 식재료를 아낌없이 조리에 사용하며 자신만의 요리 철학을 실현하는 다양한 매장을 한꺼번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한 씨는 브랜드 자체가 크게 늘었다고 전합니다. 올해 1월 네이버 지도에 등록된 국내 라멘 가게 수는 300여 곳이었는데 10월에는 400 곳이 넘었다고 하네요.

1) 최단 시간 응모자(*27시간 34분 소요)의 스탬프 인증샷
2)행사 참가자에게 전해진 면그릇
출처 : @hamkkerame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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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 시간 응모자(*27시간 34분 소요)의 스탬프 인증샷_출처 : @hamkkerame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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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참가자에게 전해진 면그릇_출처 : @hamkkeramenday

“스탬프 9개를 모두 모으신 분 중 약 15% 이상이 여성이었습니다. 젊은 남성이 대부분이었던 라멘 소비층도 점점 다양해지는 것 같아요.”

한 씨는 캠페인을 거치며 라멘 커뮤니티의 확장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스타그램에 라멘 전용 계정을 만들어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사람과 직접 교류, 라멘 가게 정보를 공유하는 여러 커뮤니티를 통하면 라멘을 훨씬 더 즐겁게 향유할 수 있다고 하네요.

“올해는 업장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2018년 1차 중흥기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라멘의 고급화와 세분화가 인상적인데요. 특히 기간 한정 이벤트 라멘을 통해 하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실현하는 업장이 늘고 있다는 게 미식의 요소로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인해 라멘의 대중화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라멘을 요리로 인식해 자발적으로 감상평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판 전체를 키우는 셈이죠.

성실한 애정이 미식 꽃피운다

지난 9월, 일본이 국경 통제 조치 완화를 발표했습니다. 무비자 장기 체류가 재개되며 개인의 자유여행이 가능해진 것이죠. 규제 완화 보도가 나오자마자 일본행 항공권 가격이 오른 가운데, 한국 라멘업계도 새로운 장을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수출입 제한 완화 시 한국에서 즐기는 일본라멘은 일본 현지에서 유입될 라멘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죠.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업장이 영업시간 내 재료 소진의 영광을 차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라멘 가게는 어떤 브랜드 가치를 지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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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스크 주문에 맞춰 요리를 준비중인 사루카메 직원_출처 : 바이브랜드

기자는 연남동에서 팬데믹이 한창일 무렵부터 라멘 가게를 운영하는 혼마 히로토씨를 찾아갔습니다. 사루카메라는 곳에서 교토와 뉴욕을 거쳐 서울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셰프죠.

“유통-인터넷의 발달로 원하는 식재료를 구하는 건 쉬워요. 그럼에도 일본 현지와 똑같은 맛을 낼 순 없죠. 제한된 환경 속에서 제약을 최소화하고 만족스러운 한 그릇을 완성시키는 것. 그것이 한국의 라멘 요리가 맞이한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그는 유서 깊은 료칸에서 10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전통연회요리를 예시로 듭니다. 전통을 고집하는 요리도 백 년 내내 늘 똑같은 방식과 맛을 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시대에 맞춰 변화한다는 것이죠.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본보기가 되는 고전과 대중적인 취향의 틈바구니에서 조금씩 진화를 거듭한다는 설명을 보탰습니다. 본인도 료칸에서 습득한 기술을 신메뉴에 응용하고 있다는 예시를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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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토씨는 ‘꽃게를 튀긴다’라는 발상이 료칸에서 학습한 일본고전 요리기술의 응용이라 설명한다 _출처 : 바이브랜드

히로토 씨는 애정을 으뜸으로 강조합니다. 라멘 한 그릇에 마음이 담기면 음식을 통해서 손님에게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남다른 사연을 갖고 요식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세계 어딘가의 라멘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관찰되며 그것이 손님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수용될 거란 의견을 전했습니다.

“라멘은 중국에서 전해져 일본식으로 변했지만 백 년 동안 많은 변화를 거치고 있어요. 기본적인 레시피가 정착했지만 여기에 다른 요리의 문법을 섞기 좋아요. 클래식한 수프에 토핑을 특이하게 얹는다거나 다른 나라 요리의 모던한 기법을 더하는 식이죠. 그런 점에서 한계가 없는 요리라 생각해요. 한국에서 라멘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죠.”

연남동 인기 라멘가게 하쿠텐의 이에케 라멘과 일본식 차슈_출처 : 바이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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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하쿠텐의 이에케 라멘과 일본식 차슈. 일 평균 100그릇을 판매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_출처 : 바이브랜드

팬데믹 이후 한국에 흥미진진한 라멘가게들이 들어서며 프랜차이즈의 지배력이 약해졌습니다. 되레 개인이 운영하는 스몰 브랜드가 많아졌죠.

기자는 이들이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경영전략과 강점 보강에 나서는지 지켜보려 합니다. 스몰 브랜드의 눈부신 성장에서 성공 비결을 찾아내는 건 잘 만든 코스요리를 즐기는 일 만큼 즐거운 지적 미식이지 않을까요? 음식은 옷이나 화장품과 달리 소비하는 순간 자기만의 감정을 가집니다. 동시에 물음이 싹트죠. ‘왜 그런 맛을 디자인했을까’ ‘이 식감은 어떻게 연출된 걸까’. 왜?를 건드리는 가성비 미식. 이번 기사를 통해 라멘의 매력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김정년

김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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