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브리아노는 올해로 758주년을 맞은 제지 회사로 세계 제지 산업의 요람으로도 불립니다. 내구성이 좋은 현대적인 종이의 출발점이 바로 파브리아노여서죠.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 미켈란제로가 애용하던 종이에서 현대에 와선 유로화 지폐도 파브리아노 종이로 만들어질 정도죠. 파브리아노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회사 하나가 아닌 종이 역사 전체를 톺아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작은 마을, 파브리아노에 모인 작은 종이 공방들이 종이 산업의 대명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파브리아노는 유럽과 아랍간 무역의 관문이었던 항구 도시 앙코나 인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 아랍은 중국의 제지 기술을 유럽에 전했고, 파브리아노는 자연스럽게 종이제작 기술을 익히고 발전시켜갔습니다. 1264년, 현재 파브리아노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문서 하나가 만들어집니다. 이전과 달리 동물 젤라틴과 목화 섬유를 활용해 만든 종이였죠.
기존에 아랍인들은 섬유끼리 결속시키기 위해 밀 전분을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밀 전분을 사용한 종이는 쉽게 변질돼 당시 공공 문서에 종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파브리아노에서 처음으로 동물 젤라틴을 사용해 종이의 변질을 막은 것입니다. 종이로 문서를 작성하는 게 용이해진 것도 물론입니다. 바야흐로 종이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현대 제지 산업의 요람, 파브리아노
미켈란젤로가 파브리아노 종이에 쓴 편지_출처 : 파브리아노
뛰어난 제지술을 바탕으로 파브리아노는 13세기부터 유럽 최대 종이 생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단순히 대량 생산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종이의 질도 고급스러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알려진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파브리아노 종이를 애용했습니다. 1487년 라파엘로가 파브리아노 종이에 스케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죠. 미켈란젤로도 1514년 파브리아노 종이에 편지를 써서 보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작곡가 베토벤 또한 1812년 파브리아노 종이에 작곡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782년 세워진 밀리아니 종이 회사의 모습_출처 : 파브리아노
파브리아노가 고급 종이 생산지를 넘어 하나의 기업으로 자리 잡은 것은 1782년도입니다. 피에로 밀리아니는 파브리아노 지역 곳곳에 흩어져있던 공방 수준의 소규모 제지공장을 하나로 모읍니다. 현재 파브리아노 회사로 거듭난 ‘밀리아니 종이회사’를 창업한 것이죠.
이를 계기로 유럽의 최대 종이 생산지 역할을 해온 파브리아노는 본격적인 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피에로의 손주 쥬세페 밀리아니는 이어 대규모 공장을 세워 가세를 확장합니다. 세계 각국의 물품을 전시한 1851년 런던 세계 박람회에서 파브리아노는 금메달을 차지할 만큼 그 기술력을 인정 받습니다.
종이를 혁신한 3가지 기술
파브리아노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모습_출처 : 파브리아노
WE ARE PAPER. 파브리아노는 우리 자체가 종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자신감을 보입니다. 종이 역사를 되짚어보면 현대적인 종이의 시작점에 파브리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파브리아노는 세 가지 기술 혁신으로 현대 제지업의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동물 젤라틴을 사용해 섬유를 결속시킨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압식 다중 해머 분쇄기(13세기)를 활용한 것입니다. 펄프의 섬유를 빻기 위해 사용하던 돌절구와 손방아 대신 더 고운 섬유질을 얻게 한 기구였죠.
파브리아노의 워터마크 기술_출처 : 파브리아노
세 번째는 파브리아노의 핵심 기술인 워터마크(Watermark)입니다. 워터마크는 이탈리아에서 필리그라나(Filigrana·선공예)라고도 불리는데 종이에 고유 마크를 삽입하는 기술입니다. 젖은 종이를 거르는 그물망에 금속선으로 수를 놓듯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그 위에 종이가 얇게 올려지게 해 원하는 부분을 반투명하게 표현합니다. 13세기 말 망가진 그물망을 구리선으로 고치던 장인이 우연히 발견한 기술이죠.
그 이후 파브리아노의 제지 공장들은 워터마크 기술을 이용해 종이에 이름·형태·품질 등 다양한 정보를 삽입, 제작자 상표처럼 사용해 파브리아노를 널리 알렸습니다. 파브리아노는 워터마크 기술 덕분에 보안 종이 분야에서 높은 명성을 얻습니다. 2002년부터는 유로화 지폐도 파브리아노 종이로 만들 정도죠.
1264
파브리아노에서 제지 산업 시작
1293
워터마크 기술 개발
1782
밀리아니 종이회사 설립
2002
페드리고니 그룹의 파브리아노 인수
2013
유네스코 창의도시 선정
파브리아노에서
제지 산업 시작
워터마크 기술 개발
밀리아니 종이회사 설립
페드리고니 그룹의
파브리아노 인수
유네스코 창의도시 선정
지속가능한 경영을 꿈꾸다
출처 : 파브리아노
파브리아노는 7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기업이 흥하고 망하는 가운데서도 종이 하나로 굳건히 버텨왔습니다. 단지 간단하게 만들 수 있고, 이미 특화된 기술이 있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브리아오는 미술 전문 용지, 여권용 종이, 인쇄지 등 각 용도에 맞는 섬유의 특징을 파악하고 각기 다른 제작 기술을 적용합니다. 수제 종이, 두루마리 종이, 두꺼운 판지나 섬유지를 모두 만드는 유일한 제지 회사가 된 비결입니다.
파브리아노가 또 하나 집중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경영입니다. 파브리아노는 자연 환경에 미치지 않는 원료로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요. 무분별한 산림 파괴를 막기 위해 국제산림관리협의회로부터 FSC인증을 받은 숲의 목재를 사용합니다. 분리수거로 버려진 종이를 섬유화해서 만든 재생 펄프도 함께 활용합니다. 청정 수력발전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대폭 줄였죠. 그 덕분에 2004년 이탈리아 환경 관리당국으로부터 통합환경 관리인증을 취득했습니다.
파브리아노 제지 공장_출처 : 파브리아노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파브리아노에는 여전히 75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제지소가 있습니다. 현대적인 종이 공장과 함께 종이를 만들어가고 있죠. 파브리아노의 종이는 수백년에 거쳐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이자 예술가들의 혼을 피워내는 밑바탕으로서 역할을 해왔습니다.
페이퍼리스(Paperless. 종이 없애기) 흐름 속에서 종이의 생존 가능성은 의심받습니다. 하지만 파브리아노는 여전히 종이가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녹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태블릿 PC에도 종이질감 필름을 붙이고, 전자책에서도 종이책과 같은 느낌을 구현하려는 등 종이 특유의 감성을 필요로 합니다.
파브리아노는 과거의 영광에 멈추지 않습니다. 21세기 들어서는 워터마크에서 비롯한 종이 보안 기술을 바탕으로 지폐 등으로까지 폭넓게 사업을 확장해가죠. 파브리아노가 또 한번 종이와 함께 만들어갈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조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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