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한 번도 닫아본 적이 없는 곳, 이젠 Good bye.
올해 인상 깊었던 노래를 하나 꼽자면 빌보드 차트 15주 동안 1위를 차지한 해리 스타일스의 ‘As it was’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 같지 않다’는 노래 가사가 인상적인 이 곡을 들을 때면 왜 남산이 떠오를까요?
The Last Christmas
미니어처로 꾸며진 호텔 로비_출처 : 바이브랜드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10월의 어느 저녁, 힐튼의 27번째 자선열차가 출발한다는 소식에 남산으로 향했습니다. 1995년부터 밀레니엄 서울 힐튼은 연말이면 로비를 미니어처로 꾸며왔습니다. 올해엔 남산과 N서울타워를 재현한 ‘힐튼 빌리지’도 자리하고 있더군요.
첫 금강산 관광이 열렸던 1998년 겨울, 당시 호텔의 홍보실 팀장이던 우진구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기획과 홍보에 참여한 ‘크리스마스 자선열차’ 이벤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 보람을 느낀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특급 호텔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도 문턱이 낮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기 때문이죠. 연말이면 자선열차로 꾸며진 호텔 로비가 30년 가까이 인증샷 명소로 사랑받아왔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의 목표는 성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행사에 함께한 동료는 아기자기한 조형물보단 로비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불과 며칠 전 처음 방문했던 기자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밀레니엄 힐튼 서울의 로비는 병풍처럼 끝이 꺾인 호텔 외관만큼이나 남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호텔 건축이 한창이던 1982년_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입구는 남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배산(背山)으로 건물을 짓는 우리의 오랜 전통과는 상반되는 형태죠. 설계를 맡았던 김종성 서울건축 종합건축사무소 명예사장은 ‘남산을 껴안는 형태’가 출발점이라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시작점을 넘으면 마주하게 되는 로비는 메인(Main Lobby)과 지하 1층(Lower Lobby)으로 구분됩니다. 이는 남산에서 서울스퀘어 방향 쪽으로 경사진 부지에서 비롯된 결과물입니다. 지하 로비부터 2층까지 약 18m에 이르는 공간의 경사면에 계단을 만들고 가운데는 비워둠으로써 개방감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죠.
웅장함을 채우는 디테일도 돋보입니다. 이탈리아산 대리석과 미국산 참나무 베니어 등 당대 최상의 소재뿐만 아니라 장인도 바다 건너왔습니다. 기둥에 있는 동판의 빛깔은 일본 장인이 하나하나 직접 닦아낸 결실이라고 합니다. 부분에도 소홀하지 않은 이 공간. 개관 39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에도 그 기품이 여전한 이유 아닐까요. 동시에 올해를 끝으로 다시 접할 수 없음에 아쉽기도 하고요.
남산은 알고 있다
호텔 가든 테라스_출처 : Millennium Hilton Seoul
1983년 개관한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대우그룹 해체 후 싱가포르 홍룽그룹의 CDL호텔코리아의 소유로 있다가 2020년 부동산 투자 회사 이지스자산운용을 새 주인으로 맞이합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지난해 호텔을 철거한 뒤 복합 시설로 개발할 계획을 밝혔고요. 건물 옥상엔 미래 모빌리티인 도심 항공교통(UAM)의 수직 이·착륙장도 설치된다고 합니다.
허용 용적률 중 약 58%만 활용한 호텔 대신 100% 꽉 채운 건물이 들어선다면 주인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죠.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 추구가 항상 정답은 아닙니다. 값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도 있는 법이니까요. 특히 건물이 아니라 건축이라면.
서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에 따르면 건물과 건축의 차이는 용도를 초월한 가치의 유무에서 비롯됩니다. 용도가 사라졌음에도 존재 가치가 있다면 건축인 거죠. 그는 밀레니엄 힐튼 서울을 ‘건축의 성취’로 표현했는데요, 남산 자락에 ‘복잡다단한 기능을 간단명료한 상자’로 풀어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게다가 기존과는 다른 비례와 표현을 통해 우아함도 잊지 않았다고.
1980년대 서울 속 호텔_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건축사적 유산으로서 의의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한국이 안팎으로 빠른 성장과 변화를 겪던 1980년대,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글로벌 호텔 체인 이름 아래 탄생한 5성급 호텔입니다.
국제적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가던 선진 수도의 기점이나 다름없는 셈이죠.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힐튼’이 주는 믿음은 남달랐을 테니까요. 덕분에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배경으로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호텔은 1987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지명된 장소이자 1997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후보의 연합이 이루어진 곳으로요.
더불어 IMF 구제 금융 협상과 최종 서명부터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신년 인사회 그리고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의 환송행사까지. 다이내믹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인 셈이죠.
1979
호텔 착공
1983
서울 힐튼 개관
1995
크리마스 열차 발차식
2004
호텔명 변경
밀레니엄 서울 힐튼
2014
로비 & 프런트 데스크
리노베이션
2019
호텔명 변경
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 착공
서울 힐튼 개관
크리스마스 열차 발차식
호텔명 변경
밀레니엄 서울 힐튼
로비 & 프런트 데스크
리노베이션
호텔명 변경
밀레니엄 힐튼 서울
과녁에 명중한 변화, 달라진 풍경
현재 진행 중인 VIP(Very important Pet) 패키지_출처 : Millennium Hilton Seoul
휴가 중 호텔 영업 종료 소식을 접했던 이진주 밀레니엄 힐튼 서울 지배인은 그때를 감정보단 ‘사실 확인’이 앞선 시간으로 회상합니다. 처음엔 체감하기 어려웠지만 추석을 기점으로 영업 종료가 조금씩 와닿기 시작했다는 그녀.
2020년 2월 경 이진주 지배인이 합류할 당시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직원들의 복장마저 자유복으로 변경될 만큼 코로나19에서 촉발된 고요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요. 호텔 역사상 전례 없는 영업 중단은 쇄신의 시발점으로 이어집니다.
팬데믹 이후로 시작된 체질 개선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바로 ‘회춘’. 이에 호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팀은 유관 부서와 함게 ‘키즈 프렌들리’를 기획하게 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내 수요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으로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 초점을 맞춘 ‘키즈 룸’을 선보이게 된 거죠. 더 나아가 5성급 호텔로는 처음으로 반려동물 출입도 허용합니다.
강아지가 돌아다니는 특급 호텔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부터 시작해서 객실 관리가 되겠느냐 등 내부적으로 우려도 있었지만 ‘마케팅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더 이상 늦출 순 없다는 판단이었죠.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구성된 1983 애프터눈 티 세트_출처 : Millennium Hilton Seoul
특히 자연 경관이 뛰어난 리조트가 아닌 도심에서 방문객의 발길을 잡기 위해서 말이죠. 파격적인(?) 호텔의 변화는 자녀를 둔 3040에게 적중했습니다. 젊은 피가 수혈된 호텔은 보다 젊어졌고요.
하드웨어 변화도 있습니다. 이는 F&B에서 두드러지는데요, 구상노사카바와 비스트로 50이 그 주인공. 구상노사카바는 겐지(1983년 오픈)로 더 유명할지도. 이름뿐만 아니라 이자카야 같은 새로운 콘셉트도 시도하며 친근함으로 스탠스를 달리 가져간 곳입니다.
1987년 국내 호텔 업계에서 최초로 선보인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폰테(1987년 오픈)도 ‘힙’하게 변신한 다이닝입니다. 할리 데이비슨을 들여와 클래식한 이태리 느낌을 아메리칸 스타일로 바꾸면서 훨씬 젊고 동적인 공간으로 말이죠. 아쉽게도 11월 5일부로 두 곳은 운영이 종료됐습니다.
참고로 카페 395는 11월 21일부터 조식 뷔페와 단품 요리로 축소되며, 오크룸은 11월 26일까지만 영업합니다. 호텔 역대 시그니처 아이템을 담은 ‘1983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길 수 있는 실란트로 델리는 호텔 영업 마지막 날까지 손님을 맞이한다고 하네요.
안녕 그리고 다시 안녕
출처 : Millennium Hilton Seoul
출처 : Millennium Hilton Seoul
장은수 문학평론가는 ‘좋은 호텔은 여행자를 시인으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텔은 '감각의 권태와 인식의 습관을 몰아내고 생생한 삶'을 되살려주는 곳입니다. 공간을 채우는 사물 하나하나가 비일상적 경험으로 이어지니까요.
출처 : 바이브랜드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 빅 플레이가 가득해진 지금도 밀레니엄 힐튼 서울은 여전히 ‘현역’입니다. 지난 40여 년 간 서울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이곳에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밀레니엄 힐튼 서울의 마지막이 될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익숙함으로 둔해진 감각을 깨워볼 때가 아닐까요. 매일 오고 가는 출퇴근길, 남산의 달라진 풍경에 아쉬워할 이는 기자만은 아닐 테니.
이순민
info@buybran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