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잊어! 뉴욕 풍미, 자바 그로서란트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 식료품점 자바(Zabar’s)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나 JFK공항을 방문했을 때 맡게 되는 특유의 진한 도시의 향. 설명하기 어려운 도시의 무드처럼 한 번 베어 먹으면 긴 시간 각인되는 식료품과 베이글을 갖춘 그로서란트가 뉴욕엔 있다. 무려 4대째 운영 중인 자바(Zabar’s). 뉴욕은 패션이 전부가 아니다.
“내 평생 이 가게 단골로 살아왔어요. 나 어릴 땐 가게가 아주 작았지요.”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Upper West Side)의 식료품점 자바에서 만난 60대 백인여성 바사가 말했다. 그는 평생지기 매릴린과 함께 노바(Nova)라고 불리는 유대식 훈제연어를 사던 중이었다. 매릴린은 샌프란시스코 주민으로 고향인 뉴욕에 올 때마다 이곳의 훈제연어를 잔뜩 사서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매장 내부 상품진열대_출처 : 자바 공식 블로그
‘샌프란시스코야말로 해산물로 유명한 도시가 아니냐?’는 질문에 매릴린은 “이 맛이 나는 훈제연어는 샌프란시스코를 다 뒤져도 없다”고 했다. 덧붙여 바사와 매릴린은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훈제연어를 얹어 먹어보라”면서 이게 바로 뉴욕의 맛이라고 강조했다.
자바의 대표 메뉴 ‘크림치즈 훈제연어 베이글’ 2)출입구와 건물외관_출처 : 바이브랜드
자바의 대표 메뉴 ‘크림치즈 훈제연어 베이글’_출처 : 바이브랜드
출입구와 건물외관_출처 : 바이브랜드
센트럴파크의 서쪽, 뉴욕 어퍼웨스트사이드는 지성과 문화의 거점이다. 북쪽으로 명문대 컬럼비아대학이 남쪽은 공연예술극장 링컨센터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배경이 된 뉴욕자연사박물관 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국내에도 큰 사랑을 받은 영화 ‘유브갓메일’에서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만난 카페 랄로도 이 동네에 있다.
어퍼웨스트사이드 관광의 정수는 자바의 식료품 쇼핑이다. 여행 블로그를 운영하는 뉴요커 재키는 “자바보다 어퍼웨스트사이드와 더 동의어가 되는 사람이나 장소, 사물은 없다”고 단언한다. 뉴욕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극작가 닐 사이먼(1927~2018)역시 생전에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갈 때 하늘에 있는 자바가 여기 자바만큼 훌륭하기를 소망한다”고 남겼다.
이러한 말이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는 것은 어퍼웨스트사이드를 걷다보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흰색 바탕에 오렌지색 로고가 선명한 자바 장바구니를 든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기 때문이다(오렌지색은 훈제연어, 흰색은 크림치즈를 나타낸다). 자바는 어떻게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자랑이 됐을까?
4대째 이어지는 가족경영, 존재가 곧 신뢰
우선 올해로 87주년이 된 오랜 역사. 자바의 창업주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루이스 자바다. 그는 1934년 아내 릴리안과 함께 지금도 자바가 위치한 어퍼웨스트사이드 80번가에 반 평 남짓한 식료품점을 차렸다. 1950년 루이스가 사망한 뒤 장남 사울이 가게를 이어 받았고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한 차남 스탠리는 25년간 법률회사에서 일한 뒤 가업에 합류했다.
가게는 점점 확장돼 현재는 2만 평방피트(약 560평)에 이른다. 5개 건물을 연결해 1층에선 식료품, 2층에서 주방 및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사울과 스탠리 형제는 70대의 고령임에도 자녀, 손주들과 함께 이곳을 이끌고 있다. 직원들 중에도 20년 이상의 장기근속자가 많아 단골손님들과 서로의 생일을 챙길 정도로 살갑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10년 아니 1년 이상도 가지 못하는 상점과 기업이 지천에 널린 세상에 괄목할 부분이다.
순서대로 루이스·릴리안 부부 / 사울·스탠리 형제_출처 :자바 공식홈페이지
루이스·릴리안 부부_출처 :자바 공식 홈페이지
사울·스탠리 형제_출처 : 자바 공식 홈페이지
자바의 자랑은 변함없는 맛과 품질, 그리고 가격 경쟁력을 꼽을 수 있다. 단골손님들은 맛과 품질의 작은 변화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법. 자바는 사업 초기부터 품질 좋은 생선, 치즈, 커피 등을 팔던 전통을 계속 이어가며 고객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모짜렐라치즈가 반 파운드에 5달러, 16온즈 미네스트로네 수프가 6달러로 홀푸즈마켓보다 저렴하다. 식품기업에서 납품받은 일반 제품을 팔기보다는 직접 제조한 ‘베이커리, 잼, 수프, 치즈’ 등의 판매에 주력한다. 치킨 데리야키 덤플링, 캘리포니아 롤 등 아시안 음식도 가짓수가 꽤 된다.
순서대로 자바의 베이커리·생선 코너·치즈 코너
순서대로 자바의 베이커리·생선 코너·치즈 코너__출처 : 바이브랜드
자바를 대표하는 아이템은 무엇일까? 바로 훈제연어와 블랙앤화이트쿠키다. 이곳의 훈제연어는 소량의 설탕을 첨가한 소금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든 연어를 75도 이하의 온도에서 훈제한 것으로 속이 비칠 정도로 얇게 저며 판매한다.
자연스레 생선 카운터 앞에는 많은 손님이 연일 줄을 선다. 훈제연어를 자르는 업무를 담당하는 91세의 직원 렌 버크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완료하고 1년 만에 다시 출근을 재개한 게 뉴욕포스트에 보도됐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그로서란트 직원의 행보가 기사화될 정도의 파급력을 갖춘 셈이다.
출처 : 뉴욕타임즈
골리앗 무너뜨린 ‘캐비어 전쟁’
역사학자 로버트 도렌웬드는 “골리앗이 다윗을 이길 가능성은 칼을 든 청동기 전사가 자동권총으로 무장한 상대와 맞선 경우와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자바는 전통만 고집하는 곳이 아니었다. 유연한 경영으로 대형 백화점으로부터 승리한 고유 역사를 지닌 스토어다. 1960년대 자바는 브리 치즈를 뉴욕에 처음 소개했고 1970년대에 이르러 썬드라이 토마토와 뇨끼(이탈리안식 감자수제비)를 뉴욕에 들여왔다. 1980년대에는 캐비어를 새로 취급하면서 이 식재료의 대중화를 위해 뉴욕을 상징하는 메이시스 백화점과 소위 ‘캐비어 전쟁’을 벌여 승리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가 이 사건을 <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전쟁인가!, Oh What a Lovely War!>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0달러였던 14온즈짜리 캐비어 캔 가격이 자바의 공격적인 가격 인하로 계속 내려가다가, 결국 자바가 119.95달러로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전한다(메이시스는 125달러).
자바는 인스타그램 등 SNS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고, 아마존이 홀푸즈마켓을 인수해 식료품 배달 서비스를 강화하기 한참 전인 2015년에 인스타카트(Instacart)와 손잡고 온라인 주문 및 실시간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식료품계의 우버로 불리는 인스타카트는 고객 대신 식료품을 사다 주는 서비스다. 이는 외출하기가 무섭던 지난해 봄 코로나 팬데믹 상황 때 어퍼웨스트사이드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출처 : 자바 공식 트위터
자바는 신발회사 반스(Vans)와 함께 운동화와 티셔츠를 출시하며 판매 수익금은 모두 푸드뱅크 등 지역사회 푸드 지원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티셔츠는 출시된 지 며칠 만에 매진됐고, 90달러짜리 자바 슬립온을 구매했다는 인증샷도 SNS에 속속 올라왔다.
팟캐스트도 운영한다. 첫 에피소드에서 자바 창업주의 증손자이자 스탠리의 손자인 윌리가 자바 매장 근처에서 자란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자바의 역사에 대해 소개했다.
거리에서 바라본 자바_출처 : 바이브랜드
군침도는 뉴욕을 한 입에, 자바의 본질
대부분 도시 사람들은 대형 프랜차이즈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거의 대부분의 식료품을 구매한다. 때문에 ‘식료품 라이프’에서 지역 특색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이런 시대에 동네 자랑이 되는 슈퍼마켓이 우리 동네에 존재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동네 가게를 통해 지역 사회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을 가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관되고 높은 품질과 합리적 가격, 차별화된 스토리, 그리고 색다르고 새로운 시도. 자바는 동네 가게가 어떻게 해야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퍼웨스트사이드를 방문한 김에 이러한 동네 가게의 매력을 체험해보고 싶다면, 자바에 들러 커피와 훈제연어 크림치즈 베이글을 주문하자. 가게 앞 테이블에 이곳 주민들과 함께, 혹은 도보 10분 거리의 센트럴파크에서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문다면 그게 자바의 맛, 뉴욕의 맛이다.
제작 강지남 정리 이한규·김정년·유재기
유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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