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간 은 어떻게 21세기 세이렌이 됐나
2020년 8월 이케아의 일본 하라주쿠 매장. 이곳 한편에 인플루언서인 그녀가 3일간 거주하며 자신의 일상을 전시했습니다. 이건 마케팅 업계가 황홀감에 빠질만한 빅이벤트였습니다. 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요리했습니다. 청소하고 요가도 했습니다. 심지어 유튜브로 이를 생중계 하기까지 했죠. 아무리 마케팅 이벤트라지만 이 정도로 사생활을 노출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니요!? 좀 이상하긴 합니다. 물론,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찾던 업계야 눈이 번쩍 뜨일 만도 했겠죠. 요새는 그녀와 같은 인물(?)을 발굴하는 게 마케팅의 신 조류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그녀는 누구일까요?
그녀의 정체는..가상인간 이마
이미 제목만 보고 다들, 눈치챘을 것 같습니다.
네. 그녀의 정체는 2018년 일본 버추얼 인플루언서 전문 기업 AWW가 만든 가상인간 ‘이마(Imma)’입니다.
매장 안에 있던 것은 이마의 활동 내역이 녹화된 영상과 이를 비추던 스크린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별 탈 없었던 것이죠. 이케아 측도 한시름 놓았을 것 입니다. 진짜 사람이었다면, 걱정해야할 인권 문제가 산더미였겠죠.
2020년 8월 이케아 하라주쿠점에서 3일간 이마의 쇼케이스 이벤트가 열렸다
이케아는 이마가 가상인간이었기에 매장 안으로 그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껏 자사의 가구를 홍보할 수 있었겠죠. 이미 3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둔 ‘이마그램(이마의 인스타그램)’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수많은 팬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는 말이죠.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기업 마케터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자! 그런데 여기서 고민해 볼 문제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그녀가 가상 인간이라는 걸 대부분 눈치채고도 다들 왜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질 않았던 것일까요.
릴 미켈라의 등장
가상인간(인플루언서) 시장은 2016년 미국에서 시작했습니다.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브러드’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브라질계 미국인이라는 설정으로 내놓은 ‘릴 미켈라’가 흥행하면서부터였죠.
모바일 시대 가상인간 전성시대를 연 릴 미켈라_출처 :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모바일 시대 가상인간 전성시대를 연 릴 미켈라_출처 :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독자분들 중에서도 그 이름 만큼은 어디선가 들어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구독자 수는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선, 메가 인플루언서이거든요.
참고로 이 인스타그램에 다른 기업이 광고용 게시 글 하나를 올리려면 약 8500달러를 내야한다고 합니다. 게시물 하나 당 1000만 원을 내야하는 셈입니다. 미켈라가 2020년 한 해에만 거둬들인 수익은 1170만 달러(약 137억 6038만원·추정치)라고 합니다. 미켈라는 샤넬, 지방시, 캘빈 클라인 등 각계 유명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며 점점 더 몸값을 높이고 있죠. 최근에는 그 인기에 힘입어 뮤직비디오도 촬영했습니다. 그것마저 대흥행. 지금 콘텐츠 업계에 이만한 히트메이커가 또 있을까요.
진격의 가상인간
그러자 KFC가 2019년, 창업주 커넬 샌더스를 근육질의 젊은 남성 인플루언서로 인스타그램에 등장시키는 이벤트를 실시합니다. 바야흐로 가상인간 붐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그래픽 기술력의 향상이 첫번째로 거론됩니다. 더불어 캐릭터, 애니메이션 산업의 성장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꼽히죠.
가상인간 이마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비교적 빠르게 시장에 안착한 일본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강국이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인간이 아닌 가상의 존재에 팬덤이 형성되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 아닙니다.
커넬 샌더스를 젊은 인플루언서로 만든 KFC_출처: KFC 인스타그램
커넬 샌더스를 젊은 인플루언서로 만든 KFC_출처: KFC 인스타그램
한국은 어떨까요. 사실 2021년 오로지(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의 TV 광고 등장 이후 가상인간 열풍이 일어났죠? 이미 그럴 수 있는 조건은 훨씬 이전부터 갖춰져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0년 이후 한국에선 웹툰과 캐릭터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굿즈 시장이 활황이었습니다. 그 사이 ‘펭수 열풍’도 휘몰아쳤죠. 이러던 참에 기술적 거부감(언캐니 밸리)을 뛰어넘는 그럴듯한 가상 인간이 나왔으니... 이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나타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실존하는 ‘스타’라고 해도 현실에서 볼 가능성은 낮습니다. 실존하는 스타와 소통 가능한 창구 또한 가상인간과 동일하게 SNS가 유일하죠. 그러니 대중은 그들이 현실 세계에 있는지 아닌지는 더이상 중요치 않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 입니다.
“MZ 세대는 웹툰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미 가상인간에 친숙한 문화를 공유합니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실언을 포함해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기는 사고를 칠 가능성이 낮아 오히려 이들이 더 선호하는 경향을 띄기도 합니다.”
-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
한국에 등장한 MZ의 표상
가상인간은 MZ 세대가 좋아하는 외향과 가치관으로 세계관과 페르소나를 구축합니다. 기업들은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가상인간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MZ 세대를 팬덤 형성의 주체로 지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가상인간은 모두 MZ의 표상과도 같은 모습과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상인간의 페르소나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국 MZ 세대가 그려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죠.
미켈라 또한 인스타그램 프로필로 성소수자를 지지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에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해시태그도 올렸죠. 로지도 MZ 세대가 선호하는 얼굴형에 환경 보호에 열중하는 설정으로 설계됐습니다. 미래의 주 소비자층인 MZ 세대를 똑닮은 외형과 성향을 가진 가상인간. 이들이 SNS를 누비자 이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로지와 한유아_출처: 각 인스타그램
로지와 한유아_출처: 각 인스타그램
국내 기업들은 이 대형 뉴비의 탄생에 기회를 찾고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광고계 러브콜 세례를 받는 로지 이외에도 롯데홈쇼핑은 2020년 9월부터 자체 개발한 가상인간 루시를 쇼호스트로 키울 계획을 최근에 밝혔습니다. 루시는 29세 디자인연구원을 콘셉트로 등장했습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다양한 패션 트렌드를 올리며 현재 2만 명 정도의 구독자를 확보했고요. 최근에는 패션 편집 공간 ‘무신사 테라스’의 체험형 마케팅에 참여하는 등 대외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마일게이트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8월 자사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포커스 온 유’의 주인공 한유아의 인스타그램을 개설한 것이죠. 그러면서 한유아를 가상인간, 인플루언서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스마일게이트는 스튜디오 자이언트스텝과 손잡고 한유아를 온·오프라인이 넘나드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키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스마일게이트는 한유아의 음원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패션 등 다양한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스타그램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상인간의 활동 무대도 제페토 등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점쳐집니다. 이마는 이미 제페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CJ ENM의 MCN 회사 다이아TV도 2020년 12월 네이버Z와 업무제휴를 맺고 가상 인플루언서를 육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따른 리스크 관리에 있어 효용을 높이고 브랜드가 효과적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면 가상인간이 인간 SNS 인플루언서를 뛰어넘는 마케팅 트렌드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은 최근 보고서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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