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잔의 중요성은 1950년대 오스트리아 와인잔 브랜드, 리델(Riedel)이 처음 발견해냈습니다. 리델이 1756년 유리 제조사로 시작해 오늘날 와인잔의 명가로 거듭난 이야기에 기분 좋게 취해 보시죠.
관세청은 2021년 와인 수입액이 5억 5981만 달러(약 7157억 원)로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비해 약 2배 늘어났다고 밝혔습니다.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과 혼술(혼자 마시는 술) 트렌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죠. 업계 관계자는 “와인은 이전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홈술 시장으로 넘어오면서 전반적으로 MZ세대들로까지 연령층이 낮아졌다”고 말합니다. 와인이 일상의 술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덕질은 장비빨’이란 말은 와인에도 통용됩니다. 와인을 집에서도 제대로 즐기기 위해 고급 오프너, 디캔터, 와인셀러 등 굿즈를 사 모으는 사람들이 늘었죠. 잔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는 와인 특성상 잔을 모으는 사람들은 특히 많습니다. 명욱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는 “지금 주류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취향 존중이다”며 “잔에 따라서 달라지는 술맛을 자신의 취향대로 찾아가는 소비자 성향 때문에 잔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라고 분석합니다.
와인잔의 중요성이 대두한지는 사실 70년도 채 안 됩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와인은 평범한 물 잔에 마셔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죠. 와인잔 중에서도 명품으로 손꼽히는 리델이 ‘와인잔의 미학’을 찾아내기 전까지는요.
와인을 꽃 피운 유리공예
초기에 디자인한 리델 와인잔_출처 : 리델
리델은 1756년 보헤미아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11대째 이어져오는 오스트리아의 유리 제조사입니다. 초기 리델은 유리 보석, 구슬, 심지어 중공업 부품도 만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와인잔 브랜드가 된 것은 9대손 클라우스 J. 리델에 이르러서입니다.
클라우스는 1950년대 이탈리아 중부 도시 오르비에토에서 소믈리에들과 와인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같은 와인을 마셨음에도 잔에 따라 와인에 대한 평가가 달랐습니다. 그는 잔의 모양과 크기가 와인의 맛에 영향을 준다고 결론 내립니다. 리델사는 잔의 디자인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식 와인잔의 원형, 소믈리에 시리즈 부르고뉴 그랑 크뤼_출처 : 리델
때마침 그는 한 고객에게서 기존 제품과 달리 와인이 많이 들어가는 잔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와인잔은 크기도 작고, 표면에 화려한 문양과 색깔을 입힌 디자인이 주를 이뤘죠. 1958년, 그는 현대식 와인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르고뉴 그랑 크뤼’를 개발합니다. 고객의 요청대로 당시 유행하던 잔보다 12온스의 와인을 더 담을 수 있었죠.
장식 없이 가볍고 긴 얇은 스템(stem)에 달걀 모양의 볼(bowl)이 올라간 유리잔은 혁명이었습니다 클라우스의 철학 ‘형식은 기능을 뒤따른다’를 반영했죠. 이 잔은 우아한 곡선미를 인정받아 같은 해 브뤼셀 세계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합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술맛 살리는 ‘2mm’
출처 : 리델코리아
리델은 직선으로 널리 퍼지는 형태의 기존의 와인잔을 좁고 둥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보다 향을 풍부하게 느끼게 한 것이죠. 입술에 닿는 촉감이 술맛을 방해하지 않도록 유리 두께도 깨질 듯이 얇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비슷한 모양의 와인잔들이 나왔지만 왜 여전히 리델이 명품으로 꼽힐까요? 명 교수는 “리델은 와인잔을 개발할 때, 생산자들과 협업했다”며 “(그래서) 각 와인에 맞는 최고의 특성을 부각시키게 만들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리델이 1973년 포도 품종마다 볼의 형태를 다르게 만든 ‘소믈리에 시리즈’를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지역별 와이너리와 협업해 생산자 스스로가 빚은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게 하고픈 마음을 담아냈죠. 카베르네 소비뇽, 피노 누아 등 각 품종의 특성에 따라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리델은 품종에 맞춰 와인 볼의 크기, 지름, 경사각 등 요소들에 변화를 줬습니다.
테이스팅을 진행하는 게오르그 리델_출처 : 리델코리아
클라우스의 아들 게오르그는 ‘잔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다’는 철학을 세계에 퍼뜨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가 포도 품종에 따라 개발한 잔은 ‘보르도 글라스’, ‘부르고뉴 글라스’ 등을 포함해 150여 가지에 이릅니다. 게오르그는 리델이 유럽을 넘어 글로벌 와인잔 브랜드로 안착하는 데도 공을 세웁니다.
그는 1989년 미국 와인의 전설로 불리는 로버트 몬다비와 만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와인 잔과 맛은 무관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몬다비 역시 게오르그의 철학에 코웃음쳤습니다. 하지만 리델 잔으로 시음한 후 깜짝 놀란 그는 이후 어느 시음회에서든 리델 잔만을 고집했습니다. 리델이 미국 시장으로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죠.
이어 리델은 2004년 독일 최대 회사 크리스털 회사 나흐트만과 그 자회사 슈피겔라우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오릅니다. 리델은 현재 세계 100여 국에 와인잔을 수출합니다. 이제 와인 애호가들은 잔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1756
리델 창립
1958
부르고뉴 그랑크뤼 개발
1973
소믈리에 시리즈 출시
2004
나흐트만, 슈피겔라우 인수
2013
11대손 막시밀리안 리델 회장 취임
리델 창립
부르고뉴 그랑크뤼 개발
소믈리에 시리즈 출시
나흐트만, 슈피겔라우 인수
11대손
막시밀리안 리델 회장 취임
계속 지펴라, 남아 있지 않게
리델에서 출시한 코카콜라 전용 잔_출처 : 리델코리아
리델 집안의 가훈 ‘불을 계속 지펴라, 재가 남아 있지 않게 하라’는 혁신적인 경영 철학에도 영향을 주었을까요. 리델은 와인이 아니라도 음료를 가장 맛있게 담아낼 잔을 연구합니다. 1997년 일본 사케 양조장 후쿠미츠야는 리델에 정종 잔 제작을 요청합니다. 리델은 100가지가 넘게 잔을 디자인하고, 일본인 정종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구한 끝에 정종 잔 ‘다이긴조’를 내놓습니다.
11대손 막시밀리안 리델 회장은 2014년 코카콜라사와 협업해 전용 잔을 출시했습니다. 샴페인 잔 생산 기술을 활용해 잔 안을 미세하게 긁어놓은 덕분에 섬세한 거품을 유지합니다. 일반적인 플라스틱 잔에 크게 맺히는 콜라의 물방울이 없는 것입니다.
파토마노 오크드 샤르도네_출처 : 리델
물론 와인잔을 혁신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리델은 2018년 지금의 시그니처가 된 ‘파토마노 와인잔’을 출시합니다. 스템에 빨강, 노랑 등 7가지 색상이 들어간 잔인데 와인잔은 온전히 투명해야 한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확 바꿨죠. 다른 사람의 잔과 헷갈리지 않게 구분하려는 막시밀리안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리델은 지금도 현대 와인잔의 ‘모태’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와인잔계의 ‘명품’으로 불립니다. 능숙한 것만 하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씨앗이 보인다면 도전하는 그들의 열정 덕분이 아닐까요.
조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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