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빛날 가문의 가치, 에르메스와 프라다
출처 : 에르메스, 프라다
스스로 차별받길 원하는 이들이 바라는 건 남들과 구분되는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인정받은 고유한 가치에서 비롯되죠.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패션에 기댑니다. 이번 시간엔 대를 이어 가문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 온 브랜드, 에르메스와 프라다 가문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전통에 혁신을 입히다, 에르메스
최고의 재료를 최고의 기술로 최고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 에르메스가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원칙입니다. 스스로를 명품이라 칭하지 않는 에르메스는 탁월한 장인 정신으로 완성된 훌륭한 제품을 통해 우아하고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 구현을 위해 에르메스는 일시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제품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창업 이래 지속된 수작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무려 185년 전부터 말입니다.
티에리 에르메스가 1837년 파리에 세운 작은 마구상에서 시작된 에르메스는 마차에 쓰이는 견고한 마구 용품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티에리 에르메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가 가업을 잇고, 3세대에 이르러서야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937년 선보인 첫 실크 스카프_출처: 에르메스
창업주의 손자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회사를 이끌던 시기는 20세기. 인류가 위대한 진보를 이룩했던 때죠. 그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교통수단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말에서 자동차로 넘어가던 시기였죠. 마구 용품으로 시작된 에르메스에게 큰 위기나 다름없었죠.
위기는 위대한 기회라고 했던가요.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과감하게 세계관을 확장합니다. 마구 용품에 미래가 없음을 직감한 그는 라이프스타일로 눈길을 돌립니다. 덕분에 에르메스의 첫 번째 실크 스카프를 비롯해 공식적인 첫 시계 ‘에르모토’와 세계 최초의 지퍼 달린 여행 가방 ‘볼리드’가 데뷔하게 됩니다. 브랜드의 시그너처라고 할 수 있는 오렌지 컬러의 패키지 박스도 이때 탄생합니다.
공장의 대량생산 체제 속에서도 에르메스는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을 지키고 품질에 대한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한 거죠.
켈리 백과 버킨 백_출처 : 에르메스(Ellsa Valenzuela)
켈리 백_출처 : 에르메스(Elisa Valenzuela)
버킨 백_출처 : 에르메스(Elisa Valenzuela)
프티 삭 오트가 ‘켈리 백’으로 바뀌고, 제인 버킨의 아이디어에서 ‘버킨 백’이 탄생하며, 150주년을 기념한 에르메스의 활동 무대는 전 세계로 확장됩니다. 2000년 뉴욕 매디슨 애비뉴에 이어 도쿄 긴자(2001년)와 서울 도산공원(2006년)에 메종 에르메스가 오픈하며 세계화에 따른 해외 진출을 시작합니다.
온라인에도 에르메스의 공간을 마련합니다. 2002년 미국에서 에르메스의 이커머스 웹사이트를 론칭하고, 3년 뒤 본 고장에서도 같은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글로벌화와 디지털화이라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에르메스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2014년 에르메스 CEO로 취임한 창업주의 6세손 악셀 뒤마가 ‘옴니 채널’ 전략에 힘은 쏟은 이유입니다. 참고로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아들이 없어 사위였던 로베르 뒤마가 회사를 이끌게 되었는데, 악셀 뒤마는 그의 손자입니다.
출처 : 에르메스
출처 : 에르메스
출처 : 에르메스
출처 : 에르메스
옴니 채널 전략의 핵심은 연결성입니다. 매장과 웹사이트를 오가면서 제품을 경험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 연결성 말입니다. 말에서 자동차로, 프랑스에서 세계로 나아갔던 에르메스의 시선이 가상 공간을 향한 것이죠. 더불어 2015년 이후부터 꾸준히 선보이는 에르메스 애플워치와 2020년 론칭한 뷰티 제품을 통해 미래 고객 대상으로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넓혀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탁월한 품질로 대변되는 정체성이죠. 에르메스가 여전히 최상급 재료 선별과 이를 다루는 장인 육성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180년 넘게 이어져 온 불변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르메스는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최고의 재료 확보에 힘을 쏟고,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더라도 무리하게 장인을 육성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과 시대 변화에 걸맞은 변화는 에르메스 가문의 가치이고 브랜드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외치다, 프라다
2년 전, 프라다에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합류한다는 소식은 큰 화제였습니다. 패션 하우스에 디자이너가 오고 가는 것은 흔한 일인데, 왜 그렇게 난리 법석이었을까요? 미우치아 프라다의 존재 때문입니다. 망해가던 프라다를 세계적인 패션 그룹으로 성장시킨 수석 디자이너이자 실질적 수장인 그녀가 프라다 그 자체였기에, 새로운 디자이너는 상상하기 어려웠죠.
40년 넘게 홀로 프라다를 책임졌던 미우치아 프라다는 브랜드에 새로운 활력을 더하고자 라프 시몬스와 함께 한다고 했는데, 그녀의 말은 숫자로 증명됐습니다. 지난해 프라다 그룹의 순이익은 약 4,00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프라다 단독 매출은 2020년 대비 40% 이상 증가했고요. 2020년 손실을 넘어 흑자 전환에 성공한 거죠. 그녀는 다시 한번 프라다를 위기에서 구해낸 겁니다.
1919년 이탈리아 왕가의 공식 공급자가 된 프라다 _출처: 프라다
1913년 여행을 좋아하던 청년, 마리오 프라다는 밀란에서 작은 가게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동생과 함께 해외에서 가져온 가죽 제품, 트렁크, 핸드백을 판매한 가게가 프라다의 출발점입니다. 6년 뒤에는 이탈리아 왕가에 가방을 납품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인류가 위대한 진보를 이룩했던 20세기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프라다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싶지 않았던 아들들 대신에 딸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습니다. 마리오 프라다는 회사 운영에서 여성을 배제할 만큼 보수적이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1975년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프라다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미우치아 프라다는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이자 이탈리아 여성 연맹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물질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물질주의와 소비로 대변되는 패션 산업에 뛰어들다니요.
미우치아 프라다와 재활용 나일론으로 만든 백패_출처 : 프라다
미우치아 프라다_출처 : 프라다
재활용 나일론으로 만든 백팩_출처 : 프라다
2년 뒤 미우치아 프라다는 그녀의 내적 갈등을 창작의 열정으로 바꾸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입니다. 그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이자 프라다 그룹을 이끄는 최고경영자입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해서 미우치아 프라다가 처음부터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닙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주로 다루던 가죽은 날이 갈수록 구하기 어려웠기에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관리하기 편하고 가벼운 소재에 대한 탐색 중 그녀는 나일론에 주목합니다.
나일론은 미우치아 프라다의 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가 가죽 제품을 파손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던 방수천이었습니다. 포코노라 불리는 이 천은 텐트나 낙하산에 사용되던 투박한 소재였죠. 패션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화려한 가죽 가방 일색이던 당시 유행을 조롱이라도 하듯 나일론 백팩을 선보입니다. 출시 초기 냉담하던 반응은 시간이 지나면서 열광으로 바뀌었고, 단순한 디자인에 실용성까지 갖춘 이 가방은 20세기를 장식한 최고의 아이템으로 등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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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프라다 애피센터 내부, 프라다 x 아디다스_출처 : 프라다
뉴욕 프라다 애피센터 실내_출처 : 프라다
프라다 × 아디다스_출처 : 프라다
출처 : 프라다
미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까지 영향력을 넓힌 프라다의 획기적인 도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포츠 라인을 통해 그 어떤 브랜드보다 먼저 정장에 스니커즈를 연출합니다. 지금이야 당연한 이 조합은 모두 미우치아 프라다의 공입니다.
프라다 그룹은 패션을 넘어 스포츠, 영화,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기존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창작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기로 유명한데요, 뉴욕 프라다 매장 애피 센터가 대표적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쿨하스와 함께 건축에 패션을 접목시킨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2009년에는 서울의 궁궐, 경희궁에서 트랜스포머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트랜스포머는 모양이 바뀌는 새로운 개념의 건축입니다. 이 밖에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와의 협업, 숏 무비 자체 제작 등 프라다 그룹은 창작에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연말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프라다 그룹 CEO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지목된 로렌조 베르텔리는 독립성을 유지한 가족 경영을 앞으로도 고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LVMH나 케어링 그룹 등 거대 패션 제국에 맞서 프라다만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것이죠.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다양한 방식을 통해 담아내는 것. 전직 카레이서 출신인 후계자가 앞으로도 이어나갈 가문의 가치이자 경쟁력입니다.
이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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